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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눈으로 보는 영화 리뷰
By 김PD . Mar 16. 2017

당신 자신과 당신의 기억

영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리뷰

강이 보이는 집에서 살면 우울해진다는 말을 다들 들은 적 있을 것 같다. 정말 그럴까? 노을에 반짝반짝 빛나는 강을 보며 산책하는 것, 또 밤공기를 마시며 강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볼 때 우울해진다? 별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그런데 우울한 사람이 강을 보면 더 우울해지는 건 확실히 맞는 말인 것 같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 상심한 이들은 심한 감정적 변화를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남자는 어제까지 그녀를 사랑했던 나와 지금 그녀를 잃어 혼자인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존재는 그대로인데 본질은 달라졌다는 느낌. 그런 감정은 강은 그대로 강인데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닌 강의 속성과 닮았다. 그래서 그런 우울감에 빠진 사람들이 흐르는 강물을 보면 세상이 덧없고 부질없어 보이며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게 세상의 이치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강에 뛰어드는 건 그런 감정의 세계 속으로 온 마음을 던지는 거다.    


어제와 오늘의 나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다. 우리는 기억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나에 대한 애착이 강할수록 기억에 집착하기 쉽다. 어쩌면 우리 인생과 우리는 강물처럼 무상한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을 받아들이면 삶은 가치를 잃어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 기억을 통제하고 장악하려 한다. 내가 믿는 어제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오히려 스스로를 구속하고 괴롭히기도 한다.     


홍상수 감독은 영화 [오! 수정]을 통해 기억이 얼마나 주관적으로 형성되는지 보여주었다면, 영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선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붙들고 있는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구속하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화가 영수(김주혁)는 여자 친구 민정(이유영)이 술 마시다 어느 (다른 연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대판 싸웠다는 말을 친구에게 전해 듣는다. 평소 민정이 술을 절제 못 하고 바람기가 있다고 생각하던 영수는 화가 나 민정에게 그게 사실이냐고 따져 묻는다. 민정은 정말 그런 일이 없었다고 딱 잡아떼는데 말하는 게 뭔가 개운하진 않지만 워낙 정색을 나니 그런 일이 진짜 없었던 건 아닌지 아리송해진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영수에게 화가 난 민정은 결별을 선언하고 영수는 매일 그녀의 집을 찾아가 재결합을 애걸하려 하지만 그녀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과연 민정과 영수의 친구 중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영수의 애인 민정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카페에 앉아 있다. 여러 남자들-재영(권해효)과 상원(유준상)이 ‘전에 만난 적이 있지 않냐, 민정씨 아니냐’고 물으며 접근을 하는데, 그녀는 매번 자신이 민정이 아니며 그 전에 만났던 여자는 자신의 쌍둥이 언니일 거라 말한다. 민정 또는 민정의 여동생은 그 남자들과 자주 술을 마시고 동네 남자들은 영수가 바람둥이 여자 친구를 만나 불쌍하다며 그녀를 비난한다.     

관객은 헛갈린다. 민정이 거짓말로 남자들을 속여 편의적으로 술자리를 하고 또 전에도 절주하겠다고 영수와 한 약속을 어기고 술을 진탕 마시다 싸움이 났는지, 아니면 민정의 동생이 여러 남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걸 민정이 그런다 오해해 억울하게 바람둥이가 되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정말 민정은 거짓말쟁이일까?    

영화를 보면 처음에는 혼란스럽지만 사실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 영화는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또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묻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영화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민정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쉽게 분간할 수 있다.      


영화는 민정의 대사와 소품을 통해 그녀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재영을 만난 카페에서 입었던 옷과 그날 밤 영수를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같고, 민정이 재영에게 벤치에 앉아 결별을 선언할 때 입었던 옷과 카페에서 상원을 만났을 때 입었던 옷이 같다. 또 항상 읽고 있는 책은 카프카의 <변신>이며, 들고 있는 핸드폰은 언제나 파란색이다. 민정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남자들은 다 이상하다, 술은 위험해서 자제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녀가 너무 좋아 미치지 않고서야 민정의 거짓말을 믿기 어렵다.    

후반부에 가서 민정은 상원(유준상)과의 술자리에서 결별한 재영(권해효)과 우연하게 다시 마주친다. 그때 그녀는 또 다시 재영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아 관객을 아연실색하게 한다.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혹시 상원을 만났던 여자는 민정이고 재영이 만났던 건 민정의 동생일 수 있지 않을까?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재영이 삼자대면에서 ‘당신 나 알지 않냐’고 했을 때 아니라고 답할 수는 없다. 재영은 논리적으로 민정과 민정의 동생을 모두 만난 것이니 그녀는 재영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 이 순간은 민정의 사기 행각이 명명백백 해지는 결정적 장면이다.    


민정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나는 민정이 욕 한 바가지 얻어먹고 나가떨어지는 통쾌한 통속극을 상상했는데 민정을 만났던 두 남자는 서로가 학교 동창임을 확인하고 여자가 민정이건 아니건 관심도 없이 옛 학창 시절 추억에 빠져 술잔을 나눈다.

봉변을 모면한 입장에선 가슴을 쓸어내려야할 것 같지만 민정은 집으로 돌아가며 눈물을 쏟는다. 울고 있던 민정은 자신을 찾아 헤매던 영수와 극적으로 만나는데 민정은 영수마저 누군지 모른다고 다시 잡아뗀다. 이 여자 정말 어디까지 갈 건가? 갈 때까지 가는 민정을 보면 어쩌면 이렇게 사는 건 하나의 신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광녀이거나 현자이거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과거는 지워버리고 항상 현재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는 가장 현명한 방식은 아닐까? 오직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고 그 순간에 가장 솔직하고 모든 것을 던지는 민정이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흐르는 강물처럼 나란 존재는 기억을 통해 하나로 붙잡아둘 수 없다. 그렇다면 그냥 그런 과거 따위 던져버리는 게 속 편할 건 아닐까?    

그토록 과거를 통해 사람의 됨됨이를 따져 묻던 영수가 그것을 포기하고 지금 현재의 그녀를 열렬하게 사랑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결말은 일종의 반전이다. 처음에 문제 많아 보였던 민정이 오히려 제대로 사는 사람이고 불쌍해보였던 영수가 기억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지금 현재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민정이 보여주는 태도(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의도)는 민정을 잊지 못 해 괴로워한 끝에 친구들에게 그녀를 옹호하는 영수의 입을 통해 설명된다. 오직 사랑만이 진짜고 그 외는 다 요식 행위이다. 다른 건 다 진짜를 버리고 얻는 쓸데없는 보상일 뿐이다. 그저 매일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만 집중하는 것.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의 대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깨달음. 그 절절한 고백을 통해 영수는 긴 방황을 끝내고 민정을 다시 사랑할 준비를 마친다. 어쩌면 거대한 거짓말을 받아들이기 위한 거대한 자기 합리화의 순간이기도 하다.   

영수는 자신을 모르는 척 하는 민정을 보며 그게 민정이 주도하는 일종의 상황극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같이 모른 척 하며 새롭게 관계를 시작한다. 새로우니 모든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 오래 동안 한 사람과 연애를 하면 가끔 과거로부터 쌓인 이미지에 눌려 현재의 상대방을 제대로 보기 어려울 때가 있다. 우리는 기억으로 이어진 연결고리를 붙잡고 현재의 위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RESET 하는 게 더 현명할 때가 있다. 긴 시간이 지나 실연의 상처를 극복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과거와는 다른 지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찾아온다.   

재영과 상원이 동창인지 확인하고 민정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는 건 아마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항상 현실에 충실하게 살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환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한 여자에게 집착하며 추파를 던지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관심을 돌리는 건 민정이 남자 친구영수와 싸우고 나와 금방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돌리는 모습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민정이 쌍둥이가 아니라는 것은 등장인물 소개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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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시사교양 편성 PD / <PD마인드> 저자 /
※ 생산자 관점에서 보는 쉬운 글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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