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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봄>

by Kimplay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머리를 감으면 말려야 되고 얼굴에 뭐라도 발라야 되니, 다 생략하고 모자를 썼다. 머리칼을 적셨으면 아직 못 나왔을 거라고 합리화한다. 가끔 한없이 늘어져 있다가 조급하게 구는 포인트들이 있는데 바로 저런 거다(귀찮은 것과 좀 다른 문제다). 아래로 처진 시간을 당기려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제야 가누지 못한 시간 위를 가볍게 딛는 노력을 한다. 좀처럼 안 되는 부지런을 떠는 대신 씻는 걸 포기하거나, 원래 가려던 장소보다 가까운 곳을 택한다. 그렇게 게을렀던 시간과의 균형을 맞춘다.


도서관에 가려다가 역 근처 카페로 향한다. 까맣고 큰 노트북 가방을 메고, 5월 중순 치고는 꽤 더운 거리를 걷는다. 해마다 뜨거워지는 여름이 어느새 봄까지 번졌다. 반바지를 입고 나와 다행이었다. 뾰족한 햇빛이 정수리를 비춘다. 눈부시게 차오르는 기운이 느껴진다.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빠르게 걷는다.


걸을수록 머릿속은 밝아진다. 걸음과 생각이 나란히 간다. 어떤 생각은 걸음보다 먼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데, 이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장소와 시간과 날씨 위를 걸으며 기억한다. 어쩌면 생각은 발에서 나온다. 걸음을 주고, 생각을 키우는 사이 카페가 보인다.


카페 안은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시원했다. 비로소 5월다웠다. 아직 시장에 없는 자두로 만든 주스를 주문한다. 겨울과 봄 사이 잊고 지낸 붉고 선명한 자두를 떠올린다. 5월의 카페에서 여름 과일을 기다린다. 안과 밖이 뒤바뀐 세계처럼 느껴진다.


노트북을 켜고 화면을 응시하는 동안, 어수선한 소리들이 섞여 안개처럼 흐려졌다. 어차피 자세히 볼 필요 없으니 다행이었다. 그사이 나온 자두 주스를 마시고 치즈 베이글을 뜯어먹는다. 내가 내는 휴대폰 알림음이나 하얀 접시에 은색 포크를 내려놓는 소리, 의자를 고쳐 앉는 소리들은 여러 목소리에 덮여 들리지 않았다. 역시 타의로 나는 소리들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소리를 이길 수 없다. 그런 시간이 지속되자, 마치 소리가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한참을 고요한 섬처럼 앉아 있었고, 밀려온 소리들은 내게 부딪혀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럴 때마다 같이 흩어지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생각은 그만두고 커서가 깜빡일 틈도 없이 하얀 종이를 채운다. 자꾸만 떠오르는 몸을 앉히며 음료수를 쭉 들이켠다.


조심히 걸어 소리를 헤치고 나오니 다시 여름이다. 눈부신 햇볕 아래 걸어가는 사람들을 본다. 그 속에 섞여 다시 봄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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