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사이, 새치가 눈에 띄게 늘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기 싫어졌다. 새치를 신경 쓰는 내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건 젊음의 특권이었음을 깨닫는다. 유독 까만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새치가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하얀 스트레스가 쌓였다.
새치 염색이라는 확실한 해결책이 있었지만 뭉개고 앉아만 있었다. 새치를 가리는 염색은 아직 이르다는 나름의 기준과 고집 때문이었다.
새치에 묶여 있다가 노트북을 켰다. 인스타그램에는 김영하 작가의 사인회 사진이 떠 있었다. 장소가 어딘지, 무슨 행사였는지보다 김영하 작가의 머리가 보였다. 굳이 사진을 확대해 들여다보니 검은색 위에 흰색이 살짝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진눈깨비 같은, 내리자마자 녹는 그런 눈이 쌓인 것 같았다. 세월이 만들어낸 머리색은 자연스러웠고, 감성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곧 우리 사이에 놓인 나이들을 헤어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직, 아 너무 일러!”
[새치]를 검색해 본다. 아래로 슥슥 내리다가 발견한 글은,
‘뽑으면 더 나니까 몇 개 없으면 짧게 자르세요.’
해 볼까? 몇 개 없는 건 아니지만, 작은 가위를 들고 화장실로 간다.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새치가 드러난다. 머리카락을 고정시키고 새치의 뿌리를 찾는다. 혼자 하려니 자꾸 놓치거나 가위질이 헛돌았다. 끊임없이 뿌리 근처를 잘라내려 애쓰면서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떠올렸고, 여러 의미에서 뿌리를 잘라내는 건 쉽지 않았다. 안 하면 더 좋고.
혼자서 가지치기한 새치는 언뜻 보면 괜찮은가 싶었지만, 훌륭할 리 없었다. 그제야 언뜻 볼 수도 없는 뒤통수가 신경 쓰인다. 이건 남편에게 부탁하기로 한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남편이 머리카락을 잘라준 적이 있다. 임신 중에 파마약 냄새를 맡는 게 겁나서 버티다가 스스로 긴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여름이었다.
그때도 뒤통수는 생각지 않고 자르기 시작했다.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서툰 가위질을 하던 도중 퇴근한 남편과 맞닥뜨렸다. 남편은 의자를 가져와 날 앉히더니, 과일 상자에 둘렀던 금색 보자기로 어깨를 감쌌다. 야무진 준비만큼 내 뒷모습도 꽤 그럴듯하게 다듬어줬다.
남편도 그때 생각이 났는지, 여전한 내가 우스운지 고개를 저으며 손짓한다.
“불 켜고 이리 와 봐.”
앉아있는 남편 다리에 기대앉으니 온기가 등을 데운다. 사락사락 머리칼을 넘기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에 잠이 온다. 그는 놀리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장비를 찾고 바꾸며 분주하다.
“작은 가위보다 큰 게 좋겠어.”
“집게가 어디 갔지?”
“불 좀 더 켜고 와 봐.”
그 정성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남편은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뒷모습을 봐주는 사람이었다. 새삼 손톱을 깎아줄 때, 자길 신경 써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던 그의 말이 이해된다. 앞으로 손톱을 더 열심히 봐주기로 결심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하루종일 나를 꽁꽁 묶고 있던 새치가 느슨해졌다.
‘새치 좀 있으면 어때?’ 하는 마음이 살짝 올라왔지만, 다음 주엔 미용실에 가서 앉아 있을 것이다. 일단 지금은 이 방법이 최선인 것처럼 누려야겠다.
남편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