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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play Aug 08. 2024

낭만 13 ξ 시간을 물에 불려 쓰고 싶었다.

5년 만의 데이트

남편이 쉬는 날이었다. 그는 등원 준비를 하는 우리 틈에서 물을 끓여 보온병에 담았다. 잠시 뒤, 남편과 아이들이 빠져나간다. 조용한 집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한다. 그사이 돌아온 남편이 나를 기다린다.


“어서 와. 산에 가자!”    

 

휴일을 앞두고 지난주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어 무덥고 습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거의 5년 만에 하는 데이트였다.      


집에서 얼마가지 않아 산 입구에 도착했다. 이른 새벽에 남편 혼자서 가끔 오르던 산이었다.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각 구간의 난이도가 어느 정도인지 자세히 알려줬다.

       

“처음이 힘들어. 여기 지나면 괜찮을 거야.”    

 

정말 초입부터 힘들었다. 운동하지 않은 날들을 한꺼번에 후회하며 나무 계단을 올랐다. 날씨가 흐려 눈이 부시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습했다. 습기를 머금은 나무가 된 기분이었다. 뿌리내려 멈추고 싶은 걸음을 옮기며 드는 생각이라곤,     

  

“도심이 더 습할까? 산이 더 습할까?”

“흙이 습기를 더 잘 먹으니까 여기가 더 습하겠지?”    

 

이런 것 투성이었다. 남편은 표지판이 나타날 때마다 얼마 남지 않았다며 기운을 불어넣었다. 잠깐 멈춰 섰을 땐 뒤에서 등을 밀어 올려주었다. 초입의 계단이 끝나자 완만한 흙길이 나왔다.

     

“아휴, 이제 좀 살겠다.”     


어려운 처음을 지나자 정말 괜찮아졌다. 드디어 우리 다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애들 등원할 때 안 울었어?”

“응, 잘했어.”     


대부분 아이들 이야기였고,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아이들로 돌아왔다. 내 목을 꼭 끌어안고 자는, 아빠가 없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이들 이야기였다. 우리만 아는 일상은 들을 때도, 전할 때도 마음이 앞서 벅차올랐다. 그 밖에도 시시콜콜해서 남에게 하긴 너무 사소하고 시답잖은 일상을 나눴다.   

   

발등에 냉동떡을 떨어트린 이야기, 새벽에 이곳은 어떤지, 방금 지나간 사람이 맨발인 걸 봤는지, 혼자 등산한 경험, 흐린 날은 혼자 오면 무섭겠어. 등등      


그런 이야기를 하며 첫 번째 정상에 도착할 즈음이었다. 솨아, 우수수, 쏴아아.

위쪽에서 폭포수 소리가 났다. 순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습기를 닦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힘내서 오른 계단 끝에는 나무만 무성했다. 그저 바람이 나뭇잎을 비비며 지나가는 소리였다. 폭포수 같은 건 바람이 만들어낸 신기루였다.  

   

산 꼭대기에서 바람에 얼굴을 씻고, 지체 없이 다음 정상으로 향했다. 우리는 서두르면서 자주 시간을 확인했는데, 아이들 하원 때문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물에 불려 쓰고 싶었다.     

  

산능선을 따라 내려오자 오른편에 철조망이 보였다. 촘촘히 엮인 철조망과 달리 펼쳐진 길은 평평하고, 노란 꽃들이 피어 있어 아름다웠다. 괜찮은 산길이 끝나자 커다란 정수장 표석이 보였다. 그걸 보니 목도 마르고 배가 고파진다. 우리는 표석 주춧돌에 앉아 잠시 쉬었다. 남편이 지도와 시간을 확인하는 동안, 인상적인 풍경을 메모했다.    

  

다시 일어나 위쪽으로 걸었다. 계단을 몇 칸 오르니 나무가 우거진 낡은 정원이었다. 몇 개의 벤치를 지나치다가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정자에 앉았다. 컵라면을 뜯어 뜨거운 물을 부었다. 남편이 아침 일찍 끓여서 담아둔 물은 라면을 맛있게 익혔다.  

    

“아, 좋다!”     


더운 날, 뜨거운 거 먹고 ‘시원하다!’ 외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봉지에 쓰레기를 담아 가방에 넣고 다시 산길로 들어선다.  

    

“지금 가는 봉우리는 여기보다 훨씬 가파르고 힘들어. 대신 그 구간이 짧아.”     


발이 흙바닥을 누르고, 단단한 바위를 골라 딛는 동안 온몸이 들썩였다. 가는 길에는 몇 개의 약수터가 있었다. 드디어 만난 약수터는 그토록 찾던 폭포수와 다름없었다. 물을 받아 주저 없이 세수했다. 물이 흘러나오는 호수 끝에는 내솥이 놓여 있었다. 남편은 물을 받아 밥처럼 꿀꺽 마셨다.      


드디어 남편이 말한 가파르고 힘들지만 짧은 계단 앞에 섰다. 올라갈수록 바람이 불었다. 결국 계단 사이에 놓인 벤치에 주저앉았다. 딛고 있는 데크에는 동그란 구멍이 있었는데, 그 사이로 가느다란 나무가 솟아 있었다. 도심에서는 볼 수 없던 나무의 높은 부분이었다.     


“오, 움직이고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 기둥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고개를 들었더니 우거진 나뭇가지가 그물처럼 출렁이며 하늘을 덮는다. 나뭇잎색 하늘. 후텁지근한 날씨. 식물원 같았다.      


어질러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다시 계단을 오른다. 쉬었더니 다리가 더 무겁다. 위안이 되는 건 돌아가는 길보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 더 짧다는 것. 아무리 가파른들 코 앞이었다. 남편은 몇 계단 앞서 올라가 나를 돌아봤다. 덩달아 뒤를 보자 출렁이는 그물 사이로 지나온 길이 보인다. 정상으로 가야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니 좀 더 힘을 낸다.   

   

“다 왔어. 여기 지나면 괜찮을 거야.”     


여기만 지나면 괜찮다는 말에 산 정상을 두 군데나 찍고 내려왔다. 그러고도,


-근처 카페에 앉아 음료를 마셨고,

-집에 도착해 여유 있게 씻었다.

-개운하게 옷을 갈아입고 각자 조금 쉬었다.

-세시에 문 여는 식당을 기다려 두 번째 손님으로 삼겹살을 먹었다.

-막걸리도 한 잔씩 나눠 마셨다.

-그래도 하원까지 시간이 남아서 슈퍼에 들어가 과자를 사 먹었다.


이제 아이들에게 간다.


습기 가득한 날, 바라던 대로 시간이 물에 불려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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