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잘 돌봐드려라"
장례 일정 중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는 일의 중심에는 나와 동생보다는 아빠와 엄마가 있었다. 내 주변에는 부고를 거의 알리지 않아 평소 아주 가깝게 지내거나 우연히 소식을 전해 들은 지인들 몇이 전부였고, 대부분의 조문객은 아빠와 엄마를 찾아왔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엄마는 9개월 동안 대형병원의 격리병동에서 아빠를 간병하느라 대충 보아도 몸과 마음이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점점 물음표가 채워진 것도 사실이다. 마치 남편과 사별한 아내의 슬픔에 비하면 부모를 여읜 내 슬픔은 보잘것없이 느껴졌고, 나는 지금 막 아빠를 잃은 딸이라기보다는 이 장례 일정을 진행하는 호스트에 불과한 것 같아 대상이 불분명한 서운함이 있었다.
아빠는 형제가 없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든 선택은 내 몫이었다. 임종 면회가 있었을 즈음 몇 차례 포털 사이트에 "장례"를 검색해 보긴 했어도, 그것을 직접 치르는 것은 처음 하는 일이었다. 장례는 내가 수집한 정보보다 훨씬 복잡한 행사였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결정하고 일정을 조율하는 일이었다. 그 3일간의 행사는 아빠의 삶과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아빠를 잘 보내드리는데 온전히 쓰도록 두지 않았다. 엄마가 모든 것을 제쳐두고 찾아온 손님들과 그간의 아픔과 슬픔을 마음껏 나누는 동안,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동시에 저녁 8시에는 몇몇 음식 주문이 마감되니 어떤 항목을 추가로 주문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일이야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다 큰 딸이지만 주변의 또래들보다는 조금 이르게 아빠를 잃은 나의 사정은 지금 어떤지 살피지 않는, 또 나를 가여워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아직까지 서운한 마음이 있다. 엄마가 내게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비로소 위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정신없이 조문객을 맞이하는 동안 과거의 짧은 인연으로 종종 연락을 주고받던 어느 모임의 지인 몇이 우연히 내 소식을 전해 듣고는 퇴근길에 빈소를 찾아 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장례식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크게 울었다. 쉽지 않은 발걸음에 담긴 그 마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중 아빠를 떠나보낸 일을 나보다 먼저 겪었던 한 지인이 내게 말했다.
"모두 너한테 엄마를 잘 챙겨드리라고 하지 않아? 난 그때 ‘그럼 나는 누가 챙겨주는데?’라고 생각했거든. 너 자신도 스스로 잘 돌봐줘."
그러고는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지인을 바라보며 문득 알았다.
‘나 지금 위로받고 있구나.’
그것은 처음으로 받아보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퇴근길 복잡한 지하철을 타고 와서는 식사도 안 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옛 직장 동료의 어색한 인사,
겨우 한 두 번 밥을 먹은 사이인데 어떻게 전해 듣고는 보내준 소중한 마음들,
다리에 깁스를 하고서도 늦은 밤 두 시간을 넘게 달려와 평소와 같이 늘어놓는 짓궂은 농담,
“퇴근하고 바로 오느라 옷이 이렇네”하며 상복을 입은 나를 보며 글썽이는 얼굴.
나는 오래도록 위로를 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에 더 가깝다. 그러나 아빠가 나를 떠나고 새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위로의 정체일 것이다.
평소에 꽃과 나무에는 취향이 없다. 그래도 아빠를 땅에 묻고 처음 찾아가던 날, 삼우제, 그리고 사십구재에는 때마다 하얀 꽃 몇 송이를 준비했다. 어떤 날은 난생처음 꽃꽂이를 해서 아빠에게 들고 갔는데, 집집마다 꽂아둔 꽃다발 중 가장 예뻐 보이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 화려한 색을 뽐내고 있는 내 것을 보고 엄마는 "아빠가 좋아하시겠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빠를 위함이 아니라고 그땐 미처 대꾸하지 못했다.
한 번은 조형 올리브나무 작은 것을 사서 삽과 호미, 조약돌과 나무를 앞뒤로 들춰 메고는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아빠가 있는 높은 곳에 홀로 찾아갔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아빠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라고 주어진 시간을 겨우 "똑 부러지는 딸을 두었다."라는 칭찬과 맞바꾼 것이 내내 아쉽고 속상했기 때문이었다.
땅을 파고 구덩이에 나무를 단단히 박았다. 퍼낸 흙으로 빈 곳을 채우고 다시 땅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 위를 조약돌로 볼록하게 덮고 나니 마치 진짜 나무 같아 꽤 그럴듯해 보였다. 무겁다고 안 들고 왔으면 아주 아쉬울 뻔했다. 하얀 리넨 천을 깔고 치즈가 들어간 빵 한 덩이와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올려두었다. 아빠와 함께 맛있는 식사에 술 한 잔 곁들이는 딸들이 평생 부러웠었는데,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비로소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작은 나무를 사이에 두고 아빠 곁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차피 아빠는 내가 갖가지 색의 꽃을 아무리 사다 날라도, 곁에 나무를 가져다 심어도, 내게 "꽃이 참 내 스타일이네~" 하고 평가를 할 수도, "우리 딸 또 왔네!"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할 수도 없는 처지다. 아빠는 지금 여기에 없다. 여기와 앉아있는 것이 아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꽃을 고르고 어울리게 매만지는 일이, 주변 사정 볼 것 없이 목놓아 울며 슬픔을 꺼내 놓는 것이, 그렇게 아빠를 마음껏 그리는 일이 상실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알았다. 이렇게 쓰는 글처럼 말이다. 모든 공부가 그렇듯 필요가 생기면 자연스레 알아지게 되는 것처럼 내게는 위로가 필요했었나 보다.
올리브 나무는 사계절을 각각 두 번씩 보내며 뜨거운 햇살과 바람에 버티다 어느새 색이 다 바래 플라스틱 쓰레기가 되었다. 한때는 나무 흉내라도 낼 수 있었지 지금은 볼품없이 변해버린 것을 어쩐지 묘원 관리인도, 엄마도 차마 버리라는 말을 못 하고 펜스 한구석에 억지로 고정해 두었다. 그 플라스틱 덩어리가 죽은 아빠와 내가 서로 주고받은 위로임을 얼마간 알아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