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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Oct 27. 2020

경희를 내품에



중학생 시절, 집 근처에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가 있었다. 나는 경희대 축제 때 가수들의 축하 공연을 보기 위해 종종 참석하곤 했다. 동방신기가 오는 날에는 맨 앞줄에 앉기 위해 담임 선생님한테 알량한 거짓말을 하고 학교를 조퇴하기도 했다. (난 카시오페아였다) 중학교 2학년 시절 경희대 축제날, 그해에도 나는 축하 공연을 하러 오는 가수들을 보기 위해 노천극장에 앉아 있었다. (그해에는 동방신기가 안 왔기 때문에 학교 수업을 성실히 마치고 갔다) 축하 공연이 슬슬 시작할 기미를 보일 무렵, 내 뒤로 경희대 재학생으로 추정되는 남학생들이 우르르 와 앉았다. 나는 같이 간 친구들과 어떤 가수 공연이 제일 기대되는지, 밤이 되면 추울 텐데 겉옷은 챙겨왔는지 같은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노천극장에는 '경희를 내품에!'라는 슬로건이 쓰여진 현수막이 크게 걸려 있었다. 나는 그 현수막을 멍하니 바라보며 공연이 시작할 기미는 보이면서 정작 시작되지 않는 이 근질근질한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 앉아있던 남학생1이 다른 남학생들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경희를 내품에'라고 하니까 경희라는 여자애를 내(본인) 품에 안는다는 소리 같지 않냐"


남학생들은 웃음소리를 그야말로 '뿜어'내며 남학생1의 말에 적극 동의했고, 마치 실제 사람을 부르듯 한참을 경희~ 경희~ 거렸다. 중학생 지원은 몸과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슬로건을 해석한 그들의 관점이 충격적이었고 이유 없이 느껴지는 수치심에 뒤통수와 등짝이 화끈화끈거렸다. 옆에 앉은 친구들도 들었나 싶어 고개를 슬며시 돌려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무표정이었다. 가만히 있는 친구들을 확인하자 내 상태와 감정이 이상한 건가 싶었고, 그 이상함을 풍기기 싫어 친구들을 따라 가만히 있었다.


마침내 공연이 시작됐고 나는 관람객 모드로 변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내가 가수를 보는 프레임 안에는 '경희를 내 품에!' 현수막이 항상 함께 있었기에, 훠우 후워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내 마음속 변방 어딘가에서는 찝찝함이 일렁였다. 슬로건이 자꾸 남학생1의 해석처럼 읽히는 게 내가 남학생1의 관점을 갖게 된 것만 같았다. 내가 가진 몇 그램의 순수함을 잃고, 잃은 양만큼 불순함이 더해진 기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친구들과 나는 감상을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슬로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그 슬로건 이야기를 쓰고 있다. 여태 속에서만 가지고 있던 그때의 상황과 그때의 나를 이렇게 글로 적어 떨어뜨려 보니 내가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중학생 지원은 "야, '경희를 내 품에'라고 하니까 경희라는 여자애를 내(본인) 품에 안는다는 소리 같지 않냐"라는 남학생1의 말에 본능적으로 섹슈얼리티(sexuality)를 연상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남학생들의 웃음과 애타게 불러대는 경희~ 경희~ 소리에 중학생 지원이 연상한 섹슈얼리티는 음지의 형태(Dark Side of Sexuality)로 변모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남학생의 입에서 발화된 '(여자애로 의도한)경희를 내 품에' 음성에서 사람이 된 경희를 자율성이 부정당한 성적 객체화된 한 여성으로 느꼈고, 현실에선 그들이 애타게 부른 '여자 경희'가 실재하지 않으니, 그러니까 '경희'라는 이름에 특정 사람의 신체가 부여되어있지 않으니 그 빈 공간에 나를 넣어 '여자 경희'에 스스로를 투영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수치심을 느꼈던 거고, 몸 뒷면이 다 화끈거렸던 거고, 찝찝했던 거고, 자신에게 불순함 느꼈던 거다.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하지만 그 당시 가만히 있었던 내 친구들 중에서도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이상함을 느꼈지만 겉으로 드러내기가 싫어 가만히 있었던 그 중학생들을 이해한다. 지금은 알고 그때는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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