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되자마자 난데없이 사랑에 빠졌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스스로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좋아한다고? 내가? 얘를? 지금?' 하고 몇 번이나 되물을 정도로 사랑에 빠진 대상마저 어이가 없었다. 남자 아이돌 J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저냥 눈에 띄면 띄는 대로 힐끗 보고 지나쳤던 굉장히 무관심한 존재였다. 간혹 유튜브에 알 수 없는 알고리즘으로 J가 속해있는 그룹의 무대 영상이 올라오면 '요놈들, 춤 한번 기깔나게 잘 추네' 대충 감탄하고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9월이 시작된 어느 날, 그게 쉽사리 되지 않았다. 나의 시선은 오로지 J에게 꽂힌 채 그의 동선만 따라다녔고 어느새 나 자신도 모르게 유튜브에 J의 이름을 검색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J를 향한 사랑이 급격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침 6시까지 J가 나오는 영상을 보다가 잠들었으며, 눈뜨면 J가 속한 그룹의 공식 트위터에 들어가 뭐 새로운 소식 없나 살펴보았다. 그 그룹은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아이돌이라 그만큼 내가 봐야 할 J의 영상, 사진, 정보의 양이 어마무시했다. 봐도 봐도 풍족하게 쌓여있는 떡밥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몇 년 동안의 J의 행적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이돌 노래를 듣지 않는 내 플레이리스트엔 그 그룹의 노래로 채워졌고 내 생에 다운받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브이앱'을 깔았다. J에게 빠진 초반에 '지원아, 그래도 얘한테 돈은 쓰지 말자. 내 마지막 자존심이야.' 하며 굳게 다짐했던 마음도 무참히 짓밟혔다. J 한 명만을 보기 위해 그 그룹의 유료 영상들을 결제하고 온라인 콘서트를 예매했다. 삶은 J 위주로 흘러갔고 내 현생에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J를 향한 마음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이상한 증상이 생겼다. J처럼 되고 싶어졌다. 그처럼 얄쌍한 몸이 되고 싶어졌고, 피부가 좋아지고 싶어졌고, 입술도 각질 하나 없이 맨들맨들해지고 싶어졌다. 반지를 여러 개 끼는 화려한 손이 되고 싶어졌다. 그의 말투와 행동마저 닮고 싶어졌다. 그래서 체중감량을 시작했고 올리브영에 가서 팩을 한 아름 샀다. 입술 위로 막 한 겹이 덮인 느낌이 갑갑해 립밤을 절대 바르지 않았던 내가 립밤과 립세럼을 매일 바르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러운 게 싫어 액세서리를 하지 않는 내가 반지 하나를 샀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 인위적으로 내 말투와 제스쳐를 점검하게 됐다. 이런 내가 스스로 기이하다 생각하면서도 J를 닮고자 하는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외적인 이미지를 열심히 닮고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쯤, 문득 나도 J의 위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J와 J가 속한 그룹의 입지는 대한민국에서 거의 탑 급이다- 나도 유명한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분야에서 그와 동등한 수준까지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은 팬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J와 조우하고 싶다는 열망까지 만들어냈다. 이런 생각까지 하는 내가 진짜 J에게 미칠 대로 미쳤나? 심각하게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가 순간 눈이 번뜩였다. 지금이 J에게 빠져나오기(탈덕하기) 좋은 타이밍이야! 이 갑작스러운 결론을 내리는 데까지 아래와 같은 의식의 흐름이 있었다.
'J와 같은 위치에 서서 사람 대 사람으로 조우하자'라는 미친 생각을 진지한 목표로 변모시키면 → 목표를 이루기 위해 J에게 쏟던 시간을 다시 나에게 쏟겠지? →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나를 발전시키는 데 더 필사적으로 노력하겠지? → 그러려면 일단 J에게 관심을 꺼야 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온라인 콘서트 티켓을 환불하고, 트위터와 브이앱을 지웠다. 유튜브는 생산적인 영상만 보며 알고리즘에서 J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간혹 어쩌다 한 번 J의 영상이 불쑥 튀어나오면 심장이 저릿해졌지만, 용케 한 번도 클릭하지 않았다. (속으론 큰 그림을 가지고 있지만) 표면상 탈덕한 초반에는 J가 너무 보고 싶고 아른거렸다. 하지만 인고의 시간이 지나니 무덤덤해졌다. 결국 J를 끊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활활 불타는 숨 가쁜 사랑을 하고 끝맺었다. 그리고 지금 난 J와 같은 위치에서 J를 조우하기 위해 내 현생을 어느 때 보다 열심히, 맹렬하게 살고 있다. 이 목표가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내 발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엄청난 동기를 부여해준다.
아이돌 J는 내 인생을 망치러 왔지만, 그는 떠나면서 나의 구원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