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는 삶을 더 열심히 살게 하는 자극제가 있나요? 그 자극제는 사람일 수도, 물건일 수도, 어떤 문장일 수도, 노래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있습니다. 저의 자극제는 생긴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제 삶 구석구석 빈틈없이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자신의 기량을 뽐내고 있습니다. 하루 대부분을 자극제를 의식하며 일을 하고 자기 개발을 합니다. 이제는 그 자극제가 없다면, 저의 삶은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힘없이 빌빌거리고 얄랑댈 거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종종 합니다.
저의 삶을 군림한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 자극제는 바로 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 J입니다. 이제 머릿속에 어떤 모습이 그려지시나요? 흐뭇한 미소를 띠며 J의 사진과 영상을 보고 노래를 들으며 이른바 덕질을 하는 저의 모습이 그려지시는지요. 피곤하고 힘든 하루의 끝에 핸드폰 혹은 노트북 속 J를 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장면도 떠오를 수 있겠습니다.
네, 맞습니다. J를 알게 된 첫 한 달은 그랬습니다. 자정쯤 침대에 누워 아침 6시까지 J의 영상을 보다가 잠들었고 눈뜨면 J가 속한 그룹의 공식 트위터에 들어가 뭐 새로운 소식 없나 하고 살펴보곤 했습니다. 아이돌 노래를 듣지 않는 제 플레이리스트에는 그 그룹의 노래로 채워졌고 제 생애 다운받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브이앱'을 깔았습니다. J 한 명만을 보기 위해 그룹의 유료 영상들을 결제하고 온라인 콘서트를 예매했습니다. 삶은 점점 J 위주로 흘러가게 됐고 저의 현생에는 집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J를 향한 마음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이상한 증상이 생겼습니다. J처럼 되고 싶어졌습니다. 외적으로요. 그처럼 얄쌍한 몸이 되고 싶어졌고 피부가 좋아지고 싶어졌고 입술도 각질 하나 없이 맨들맨들해지고 싶어졌습니다. 반지를 여러 개 끼는 화려한 손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그의 말투와 행동마저 닮고 싶어졌습니다. 마음속에서 음침하게 숨죽여있던 이 욕망은 이내 행동으로 발현됐습니다. 저는 체중감량을 시작했고 올리브영에 가서 팩을 한 아름 샀습니다. 입술 위로 막 한 겹이 덮인 것 같은 느낌이 갑갑해 립밤을 절대 바르지 않던 제가 립밤과 립세럼을 매일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게 싫어 액세서리를 하지 않는 제가 반지 하나를 샀습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는 제 말투와 제스쳐가 J와 닮은 구석이 있도록 점검했습니다. 이런 저 자신이 기이하다 생각하면서도 J를 닮고자 하는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외적인 이미지를 닮고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쯤, 문득 저도 J와 같은 위치가 되고 싶다는 또 다른 욕망이 생겼습니다. J와 J가 속한 그룹의 입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탑 급입니다. J와 같은 위치가 되고 싶다는 말은 저 역시 유명한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 분야에서 그와 동등한 수준까지 올라가고 싶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이 욕망 뒤에는 또 다른 진짜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팬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J와 조우하고 싶다는 열망. 이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J와 비슷한 위치에 놓여있어야 한다고 제 나름대로 판단을 한 것입니다. 자, 이번에도 욕망을 행동으로 발현할 차례입니다.
먼저, J가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오게 된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크게 따져 봤을 때는 '정상을 찍을 때까지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무던히 노력해왔다.' 가 그 이유입니다. (물론 운도 따라줬겠죠) 세밀하게 따져 보면 '잠자는 시간 빼고 연습만 했다. 친구와 놀 시간에 연습만 했다. 취미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연습만 했다. 연습만 했다. 연습만 했다.' 입니다. 실제로 J는 한 인터뷰에서 항상 일 아니면 연습을 하는 패턴으로 살아와서 쉬는 시간이 생기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정도로 자신의 분야에 미쳐 살아왔던 거죠. 제 머릿속에는 'J와 동등한 수준까지 올라가려면 내 분야에 미친 듯이 몰두해야 한다'는 결론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려면 제 삶의 리듬을 산산조각내버린 'J 덕질하기'부터 그만둬야 했습니다.
온라인 콘서트 티켓을 환불했습니다. 트위터와 브이앱을 지웠습니다. 유튜브는 생산적인 영상만 보면서 알고리즘에서 J의 흔적을 지워갔습니다. 간혹가다 J의 영상이나 사진, 기사가 불쑥 튀어나오면 심장이 저릿해졌지만, 용케 클릭하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제 분야, 편지와 에세이 쓰기에 몰두했습니다. 매일 글을 쓰고 책을 읽었습니다. 글쓰기의 폭을 넓히고 싶은 욕심도 생겨 작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하고 있는 사업 '아투와'의 서비스도 확장했고 적극적인 홍보도 해나갔습니다. 쉬는 날을 의도적으로 없앴습니다. 앞으로 1, 2년간은 쉬는 날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J도 그랬을 거니까요.
J도 그랬을 거니까. 이 문장은 저 스스로 다그치며 일할 때, 마음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면 속으로 외치는 구호가 됐습니다. J가 해왔을 엄청난 노력을 가늠하며 의식적으로 구호를 외치고 제 분야에 몰두했습니다. 저를 채찍질했습니다.
이렇게 석 달을 살았습니다. 그 사이 저도 모르는 새에 J는 저의 라이벌로 변모되어있었습니다. 참 웃긴 일이지요. 라이벌은 같은 분야에서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지 맺어지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J를 라이벌로 생각하게 된 게요. 여하튼, J가 잘되고 있다는 기사가 뜨면 괜한 시기심이 들었고, 나도 꼭 저렇게 성공하고 말거야 라는 다짐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습니다. 제법 비열한 생각도 했습니다. 너는 정상을 찍어서 내려올 일만 남았다면, 나는 내려갈 바닥이 없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 어쩌면 이건 건강한 라이벌 의식이 아니라 일방적인 질투일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보다 상대에게 눈이 먼 위험한 질투요. 그런데 여기서 기묘한 게 하나 있습니다. 어쩌다가 보게 되는 J의 사진, 그리고 그 사진 속 J의 미소를 보면 저도 같이 스르르 입꼬리가 올라간다는 겁니다.
불가사의합니다. J에게 온갖 감정을 다 느낍니다. 사랑, 질투, 동경, 간혹 동정. 이것들 말고도 단어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도 피어오릅니다. J와 사람 대 사람으로 조우하고 싶다고 했지만, 이 순간만은 J와 실제로 아는 사이가 아닌 것에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가 실제로 아는 사이고, 라포 형성까지 된 수준이라면 저는 더 혼란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이 괴랄한 관계를 뚜렷하게 무엇이라 정의내릴 수 없음에 힘겨웠을 겁니다.
이런 격동의 시기를 거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마음이 조금 안정됐습니다. 이제는 J를 공식적인 저의 자극제로 귀결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J에게서 어떤 감정을 느끼든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감정들을 일일이 따져가며 분석하려 하지 않습니다. 말(馬)의 등에 탄 사람이 기다란 막대 끝에 당근을 매달아 말의 눈앞에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당근을 흔들거리는 모습을 그려보세요. 말은 당근을 먹기 위해 그저 열심히 내달릴 뿐, 당근에 느끼는 감정 하나하나에 의문을 두거나 골똘히 고민하지 않습니다. 저도 이제 그 말이 됐습니다. 당근에 드는 복잡한 감정이나 생각을 따지려 들지 않습니다.
비록 이전에는 잠깐 J의 추락을 고대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더 J가 승승장구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지 제 삶도 그를 따라 계속해서 달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제 자극제는 위험하고 불안정합니다. J가 허튼짓을 해서 추락하게 된다면 저는 자극제가 사라져 삶에 대한 열정이 주춤하겠지요. 그리고 그를 공식적인 인생의 자극제로 여겼다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럽겠지요. 하지만 이런 잠재적인 리스크마저 품었습니다. 저는 근시적으로 삶을 사는 경향이 있어 당장 제게 영향을 주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아무래도 저에게 이토록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아이돌 J가 누군지 궁금하여 못 견디시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SNS나 이메일 주소를 아신다면 개인적으로 연락주세요. 알려드리겠습니다. 단, J가 누군지 알게 된 순간부터 저의 자극제를 비밀로 간직해주셔야 합니다. 꼭이요. 언제 그런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죽을 때까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정말 J와 동등한 위치에서 조우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과거에 J에게 수많은 감정의 혼란을 느끼며 별별 난리를 쳤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거든요. 거 되게 멋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