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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Oct 27. 2020

사랑했던 당신에게



지원입니다. 무탈히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이제 당신이 궁금하지 않습니다만, 문득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노트북을 열고 타자를 칩니다.

시간이 그새 많이 흘렀습니다. 삼 개월 뒤면 저는 스물일곱이 됩니다. 당신의 기억 속 저는 스무 살 초반의 모습이겠지요.

스무 살 초반, 당신과 함께였던 제 모습을 복기해봅니다. 그 시절 저는 약한 바람에도 휘청거렸고, 외줄을 걷듯 위태로웠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를 주체하지 못해 맹렬했으며 허상과 꿈결에 취해 대부분 혼곤했습니다. 가끔 거북하고 과해 주변인들을 숨 막히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저를 올곧게 바라봐주었고 넉넉하게 품어주었습니다. 제가 어둠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는 손을 내밀어 세상 밖으로 꺼내주는 구원자이기도 했으며, 허튼 판단으로 안전한 인도에서 벗어나려 할 때 따끔하게 혼내주는 선생이기도 했습니다.

어찌. 어찌 그럴 수 있었던 건가요. 당신은 단지 비위와 인내심이 특출나게 뛰어난 봉사자였던 건가요. 아니면 저라는 다듬어지지않은 원석을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다 자만하려던 카타르시스 스토커였던 건가요. 것도 아니라면, 저를 진심으로 아꼈던 건가요. 그런 건가요.

그때의 저는 저만 생각하여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았지만 당신만은 종종 힐끗거리며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음침하게 당신을 곁눈질 하다 어느 날 내게 지쳐 힘이 빠져버린 당신을 목격했습니다. 미안했어요. 미안했지만 제가 더 우선이었습니다. 나는 내게 지친 당신을 무시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돌보지 않아도 당신은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줄 것이고 먼저 다가와 줄 것이라는 두터운 믿음이 있었거든요.

어느 날, 당신은 저를 놓아버렸습니다. 매정하게 등을 돌린 게 아니라 그냥 조용히 당신의 품 밖으로 나를 내놓아버렸습니다. 저는 어벙벙하게 당신의 품 밖으로 밀려났고, 갑자기 마주한 현실이 춥고 무서웠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당신 없는 현실에 적응하는 데 꽤 오래 걸렸습니다. 그 '오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일 겁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신이 나를 놓아버리는 건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던 건데, 그때 저는 왜 진즉에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요. 눈치챘더라면 당신의 품 밖으로 나갈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을 텐데. 참 시야가 좁았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 이 나이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당신과 나 사이에 놓여진 저울이 균형을 이뤘을까. 당신은 자신을 소진해 가면서 나를 품어주지 않아도 됐고 나도 당신의 존재를 소중하게 생각했을까. 나는 성격이 많이 변했고 나름 성숙해졌습니다. 그럼 이제 나는 당신에게 무해할까요.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의 내가 당신을 만났다면 당신을 나를 품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위태로웠기 때문에 당신은 나를 품었던걸요.

위에서 말했듯 저는 이제 당신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리워하고 후회하는 시간이 드디어 끝이 났지요. 그저 옛날 그 시절 우리를 가끔, 아주 가끔씩 떠올릴 뿐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생겨나는 건 당신에 대한 그리움, 미안함이 아니라 그때의 제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큽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부족하고 어리석던 과거가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굳이 과거의 나를 부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때의 나를 긍정합니다.

나는 우리가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태평양처럼 넓었던 당신. 어지러웠던 나. 이대로 과거에 남겨 그대로 박제해 놓고 싶습니다. 그저 그렇게 남겨놓고 떠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말합니다.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2020년 가을

지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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