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코타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에요? 하고 물으면 나는 대번에 "이사카 코타로" 하고 말한다. 그리고 검색 한 번 없이 그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어떤 작품은 어떻고, 어떤 이야기는 어때서 좋고, 이 소설과 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엮이는 지 다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한국에서 그의 인지도는, 내가 신이 나서 그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듣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있겠네요, 저도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정도에 그친다고 할 수 있지만, 아마 이번에 강동원 주연의 영화 <골든 슬럼버>를 통해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이 조금은 더 알려지지 않았을까 기대를 해 본다.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의 표지를 보았을 때, 목검을 가진 도둑이랑 검은 구슬이랑 이발소 간판에다가 배경이 화성인가? 이 이야기는 화성에서 벌어지는 일인가? 하고 호기심을 가득 안았다. 기묘하게 피를 흘리는 것 같은 이발소 간판을 보며, 화성에 있는 이발소에서 살인사건이라도 일어나는 모양인가, 지레 짐작을 했다. 매번 새로운 이야기들을 짜임새 있게 보여주는 그의 작품에, 매번 기대하고 매번 기대 이상의 재미를 얻는 것이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표지를 통해 짐작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리고 역시나 향토애 강한 그의 작품 특성대로 작품의 배경은 일본 센다이 시였다. 물론 현재의 센다이 시와는 조금 다른 '가공의 일본'의 '가공의 센다이'가 배경이었다. 이야기는 이 가공의 일본에서 '평화경찰제도'가 시행되며 벌어지는 사건에서 시작이 된다.
'평화경찰제도'란, 관할구역을 정해서 그 구역 내에서 수상한 조짐을 보이는 사람을 색출해 테러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미리 '처형'을 하는 제도인데, 이 제도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평화경찰'이고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위험인물'을 선별하고 심문하여 '자백을 받아내'고 처형을 한다.
소설의 도입부에 중세시대에 있었던 '마녀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평화경찰제도가 바로 이 마녀사냥에서 모티프를 따왔다는 것을 암시하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즉, '마녀로 지목되기만 해도 마녀로 처형을 당하는'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처럼, 평화경찰제도 역시 '위험인물로 지목되기만 해도 위험인물로 처형'을 한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날조된 사실들로만 위험인물을 재구성하여 결국 처형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위험인물을 처형하는 처형식에 개미떼처럼 구경을 한다. 마치 즐거운 유흥이라도 되는 것처럼.
처형식 역시 중세시대 사형과 같이 진행이 된다. 단두대에 머리와 두 손목을 넣으면 위에서 칼날이 내려와 처형하는 식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데도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수십 수 만명의 사람들이 모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나의 '쇼'처럼 즐기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의 얼굴은 마치 광기가 가득한 것 같아 보인다.
P.409 포유류인 사람임이 분명한데도 다들 파충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복잡한 건 됐고 그냥 빨리 처형해버려!'라는 말풍선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위험인물로 처형이 되는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다. 청소년보호법에 의해 웬만한 범죄에도 처벌을 받지 않는 대상인 청소년들도 위험인물로 지목이 되면 처형을 당한다. 이 제도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이고 그저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정도의 생각뿐인 것 같아 보인다.
이 때 쯤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정의의 편'이다. 바로 표지에 나와 있는 도둑과 같이 보이는 옷차림의 사내가 그 '정의의 편'이었다. 우습게도 이 '정의의 편'이라는 명칭은 평화경찰 건물에 들어와 심문을 받던 위험인물들을 구출해내고 평화경찰 두 명의 목숨을 빼앗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나온 특별 수사관이 장난스럽게 붙인 것이다.
P. 167 "정의의 편이라는 호칭은 뭐야? 그렇다면 우리가 악이라는 뜻인가?"
"말도 안 됩니다. 세상에 악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전부가 정의라고 해도 될 정도죠. 해충이라는 벌레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벌레 스스로 생각하면 자신은 유익한 벌레이니다."(하략)
이사카 코타로의 세계에서는 '정의'도 '악'도 없다. 그냥 각자의 위치에 맞게 역할을 다 할 뿐이고, 그렇게 역할을 다 하느라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 그런 그의 세계관이 잘 녹아나 있고, 나는 그래서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
아무튼 이 '정의의 편'은 평화경찰에 대응하는 일 뿐만이 아니라, 위험에 빠진 소녀를 구하기도 하고 폭행을 당하는 고교생을 구해주기도 한다. 특별 수사관의 등장으로 '정의의 편'의 정체에 한발짝 더 다가가는 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단서가 증발해버린다.
그리고 그 다음장에서 '정의의 편'의 서사가 시작이 된다.
소박한 반전이었다. 어쩐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하였고 나는 놀라서 연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표지에 있던 그림이 바로 이런 뜻이구나! 정말 기가 막힌 복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작품 내내 흩뿌려 놓았던 작고 작은 파편들이 모여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정의의 편'이 내놓는 서사는 그가 어째서 '정의의 편'이 되었는지 그 자신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영웅은 한 사람을 구하면 다른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고 위선자 소리를 듣는다. 그는 이런 것들이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에, 그는 그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운다.
P. 370 우리 가게 단골손님만 돕자. 좀 더 나아가 그 손님의 가족까지만 돕자.
나는 세상 모두의 이발을 하는 게 아니다. 가게에 오는 사람한테만 해준다. 이와 같은 원리로 '단골손님의 위기를 알았을 때는 도와줘도 좋다'고 스스로에게 허락을 해 주었다.
가게 손님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장사의 기본으로, 이것은 결코 선행이 아니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다.
'정의의 편'은 이렇듯 자신이 세운 원칙에 위배되지 않을 만큼만 사람들을 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골손님이었던 고교생이 위험인물로 처형이 될 때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위험한 순간에도 자신의 목숨을 잃을 걸 알면서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정의의 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 부분은 클라이맥스 중의 클라이맥스였다. 손에 땀을 쥐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나였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타나는 결말부에는 '정의의 편' 자신마저도 맥이 빠지는 전개가 벌어진다. 소설 전반에 자박자박하게 흩뿌려져 있었던 단서들을 조각조각 모아서 퍼즐처럼 끼워 맞춘다. 이것이 이사카 코타로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성 방식이고, 나는 그렇게 빈 틈에 딱 알맞게 들어가는 조각들을 찾아내서 끼워 맞추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는 사회 비판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카 코타로는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 속에서 사회의 어떤 면모들을 종종 비판하곤 했다. 그가 주된 비판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신의 생각 없이 무리 속에 섞여 떠밀리듯 행동하는 사람들이었고, 이 작품에서 역시 그의 비판적인 의식은 여실히 드러났다.
P. 441 환호성도 없지만 휘파람도 비난도 없다. 관중은 침묵한다.
모두가 침을 삼키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무수한 눈이 이쪽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모습에 니헤이는 으스스함을 느꼈다. 사고를 지닌 인간의 무리라기보다 무의식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나 곤충의 무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활동하는 것은 무리를 짓지 않을 때뿐이다.
진정한 인간성은 '무리'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하나하나가 자신의 사고과 신념을 가지고 자신만의 행동을 할 때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안정적인 인간 사회는, 하나의 신념과 사고방식으로 똘똘 뭉쳐있는 동물 무리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로 뭉쳐 있지만 각자의 생각과 신념을 존중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들 간의 결속력을 다져주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는 셈인 것이다.
P. 242 "이렇게 S극과 N극의 방향을 가지런히 해서 묶는 것과 (중략) S극과 N극을 뒤섞어 묶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자력이 강할 것 같습니까?"
"그야 아무래도 같은 방향이?"
"맞습니다. S극과 S극을 나란히 맞추면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석을 만들기 위해서는 잘게 부수어 방향을 맞춥니다. 다만 방향을 뒤섞는 쪽이 안정됩니다."
"안정된다고요?"
"자력이 약해지지만 묶기도 쉽고 에너지 면에서 안정됩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에서 안정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므로 사회인의 사고방식도 하나로 다 맞추지 않는 쪽이 자연적인 상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힘은 약하지만 안정됩니다."
이 사회는 엉망진창이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러면서 질문을 한다. "그렇다고 화성에 가서 살 생각인가?" 이 질문의 저의는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성으로 썩 꺼지든지 아니면 바꾸려고 어떻게든 행동을 하라고 하는 질책은 결코 아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을 매섭게 꼬집는다. 사회가 바뀌길 원한다면 무엇이든 하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화성이든 어디든 이 사회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면 되는데, 과연 사람이 모이는 곳에 문제가 없는 곳이 있을까? 화성에서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분명 하나의 해결책이 된다면 그래도 좋다. 그렇지 않으면 꼭 '정의의 편'처럼 용기 있게 사람들을 구해내는 행동이 아니더라도, 이 사회가 바뀔 수 있을 작은 행동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단언컨데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들을 정말 좋아한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좋다. 그가 작품을 구성하며 짜임새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도 좋고, 그러면서도 긴장감을 놓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전개하는 것 역시 좋다. 사회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결코 지루하지 않고, 또한 익히 아는 익숙한 이야기들을 참신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도 좋다.
아마도 나는 그의 다음 작품을 또 기다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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