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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Jun 18. 2018

러시 라이프 - 이사카 코타로

M. C. Escher - Ascending and descending. 1960

러시 라이프

이사카 코타로


<러시 라이프>는 2006년에 한국에 출간되면서 소개된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이고, 말하자면 벌써 10년도 더 된 소설이다. 내일 있을 이사카 코타로의 신간 소설 <악스 AX> 출간 기념 사인회를 맞이해서 (신간을 아직 배송받기 전이라) 기존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러시 라이프>를 처음 읽었을 때의 전율을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에 꺼내 들었다.


P. 423~424 "일생 중 딱 하루만이 내 당번이야. 그날은 내가 주역이 되는 거야. 그리고 다음 날은 다른 인간이 주역을 맡아. 그러면 유쾌하지 않을까, 하고. (중략) 어제는 우리가 주역이고 오늘은 내 집사람이 주역. 그다음은 또 다른 인간이 주역. 이런 식으로 이어져간다면 재미있지 않겠어? 릴레이처럼 이어지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인생은 한순간이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거야."
"사람의 하루는 다 그게 그거야. 우리들의 어제도, 자네 집사람의 오늘도, 또 다른 누군가의 내일도. 한꺼번에 바라보면 다 똑같아 보여."
"그렇지 않아."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을 여럿 다루었는데, 반복해서 나오는 그 특징 중 하나가 '소름 끼치는 반전'이다. 이야기 초반에 스치듯 지나가는 사소한 단서들이 결말부에 퍼즐 조각처럼 끼워 맞추듯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이야기를 완성시키는데, <러시 라이프>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나 세밀하게 조각난 퍼즐들이 산재해 있는 작품이다. 다시 읽은 건 나도 거의 십 년 만이라 이전에 읽었던 내용이 어슴푸레 기억이 났지만 집중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한국판 <러시 라이프> 표지는 에셔의 작품 '오르내리기'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글 처음에 나온 바로 그 그림이다. 나는 에셔의 작품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발견하자마자 그야말로 에셔에게 빠져버렸다. 작년에 세종 미술회관에서 에셔 특별전이 열렸는데 그때 그의 세밀한 작품들을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에셔 특별전 리뷰 참고 https://blog.naver.com/lo_de_lolita/221102304825 )


이 그림처럼 소설 <러시 라이프>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각각의 인물들이 의외의 접점을 가지고 서로의 존재를 어필한다. 심지어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골라 읽으면 그 나름의 시간 진행 순서가 이어지지만, 뒤죽박죽 섞어두니 순서가 엉망진창인 것처럼 느껴진다. 수학공식을 풀듯이 꽤 머리를 쓰며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바로 위에 인용한 대화문을 읽고 나면 이 책의 내용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점이 보인다. 각 인물들의 특별한 하루가 릴레이 바통을 넘기듯 다른 주인공에게 넘어가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러시 라이프>를 처음 읽었을 때에는, 작품에 나오는 금발 벽안의 외국인 여자에게 왠지 모르게 꽂혀 있었다. 그가 작품에서 어떤 이야기를 리드하는 인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각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스치듯이 나타난다. 그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센다이 역 광장 앞에서 "좋아하는 일본어를 가르쳐 주세요."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서 있으면서 중심인물들의 성격을 파악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P. 19 그녀가 들고 있는 플래카드 때문이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본어를 가르쳐주세요.'라고 쓴 스케치북을 보행자들이 잘 볼 수 있게 들고 있다.
"그건 직접 쓴 건가?"
구로사와는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았다.
백인 여자는 대학에 다니는 유학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미소 지었다.
"일본인들이 어떤 말을 좋아하는지 조사하고 있어요."
"어떤 말이 많은데?"
(중략)
"'꿈'이라든가."
"이라든가?"
"경기(景氣)'같은 말이 많아요."
(중략)


등장하는 중심인물은 총 다섯 명이다. 우아한 도둑 구로사와는 스케치북에 '밤'이라고 썼다. 20층 높이 건물의 17층에서 아버지가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는 가와라자키는 '힘'이라는 일본어를 좋아한다고 적었다. 불륜 커플인 쿄코와 아오야마는 각자의 배우자를 죽이러 가는 길에 각각 '마음'과 '약속'을 썼고, 40대의 실직자인 도요타는 '무직(無職)'이라고 쓰려다가 '무색(無色)'이라고 쓰는데 일본어로는 발음이 같다.


어지럽게 얽히고설킨 각각의 인물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성격도 각양각색으로 너무도 다르고, 어쩐지 벌이는 일들이 어설프게 실패하기도 하며 대처 방법도 제각각이다. 각각의 세계에 발을 푹 담그고 바라보는 것도 좋고, 에셔의 그림에서처럼 먼발치에 서서 그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역시 좋다. 혹은 그 모든 사연에서 떨어져 나와 연구하듯 바라봐도 좋을 것 같다.


P. 276~277 "하지만 말이야, 인생에 관해서는 누구든 아마추어야. (중략) 누구든 첫 출전이야. 인생에 프로가 있을 리 없어. 가끔 자기가 무슨 인생의 프로라도 되는 양 잘난 척하는 놈도 있더라만, 실제로는 모두가 아마추어고 신인이야. (중략) 처음 시합에 나간 신인이 실패했다고 의기소침해하다니, 웃기잖아."


이야기만이 흥미롭고 흡인력 있는 것이 아니라, 곧곧에 나오는 촌철살인 같은 글귀들이 있다.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거나 혹은 고민이 많은 우리들에게 조언을 속삭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흐름과도 긴밀하게 이어져서 마치 내가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읽으면서 나름 메모한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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