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야기하는 만화책에서 페미니즘 읽기
<세븐시즈 7SEEDS>는 2001년부터 연재가 시작되어서 2018년에 완결이 난 타무라 유미의 작품이다. 타무라 유미의 작품은 <바사라 BASARA> 때부터 눈여겨봤는데, 그의 방대한 세계관을 비롯해 여성주의적 시각을 다분히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림체가 순정만화 같아 보이지만, 내용은 꽤 혁신적이고 혁명적인, 이른바 소년만화적인 주제를 품고 있는데, 그런 강인한 중심 이야기와 탄탄한 스토리 구성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면 특징이다.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기억에 안 나지만, 한 번 읽기 시작했더니 끝을 모르고 빨려 들었던 것만큼은 생생했다. 이미 전작인 <바사라>도 닳고 닳을 만큼 읽고 또 읽었고, <세븐시즈> 역시 언제 완결 나나 기다리며 읽어왔는데, 바로 지난달 5월, 한국에 정발본이 출판되면서 완결을 맞이하게 되었다.
<세븐시즈>는 7개의 씨앗이라는 뜻으로, 운석 충돌로 지구가 멸망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깨어난 일곱 명의 청소년들과 한 명의 가이드가 위기를 해쳐나가며 성장하는 내용이다. 지구의 멸망을 예감한 '어떤 세력의 사람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혹시 전멸을 하면 안 되니 8명을 한 팀으로 구성하여 총 다섯 팀을 선발하는데, 각각 봄-여름A/여름B-가을-겨울 팀이다. 이야기는 여름B팀의 나츠부터 시작한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써버리면 스포일러가 되어버리니 내용 설명은 이쯤에서 마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야기하는 이 만화가 어떻게 페미니즘을 녹여냈는지를 소개하고 싶다.
흐름을 주도하는 매력적인 여성 주인공들
정말 많은 여성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색깔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다른 어떤 만화책을 봐도 이만큼 다양한 성격의 여성들이 자신만의 서사를 가지고 등장하는 이야기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이와시미즈 나츠'는 여름B팀에 속한 소심하고 얌전하며 겁이 많은 아이다. 자신의 의견을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해본 적이 없고 유약하기만 하다. 그런 그도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리며 '어떡하지'를 연발하다가 뜻밖의 활약을 하기도 한다. 겁이 많은 만큼 주의력이 깊기 때문에, 그것은 재난 상황에서 큰 재능으로 발휘된다.
그와 정반대의 성격을 보여주는 봄팀의 '스구로노 하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배운 서바이벌 기술 덕분에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강인한 여성의 표본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지만, 책임감이 강한 만큼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세울 정도로 가혹하게 굴기도 한다.
같은 팀의 '타이아미 치사'와 '아마챠 후지코' 역시 각자의 성격을 놀랄 만큼 매력적으로 드러내 준다. '치사'는 얌전한 요조숙녀 같은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강인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후지코' 역시 타인을 잘 보살피며 상냥하지만 의사의 소양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치유한다.
여름A팀의 '아유'와 '니지코'는 인간적이지 않은 차가운 모습을 보여주며, 때론 섬짓한 행동을 할 때도 많다. 이들 역시 다른 팀의 사람들과 만나서 부딪히며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기도 하고 변화, 발전한다.
이 외에도 전형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들이 자신의 서사를 마음껏 발휘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단순히 영웅적인 여성들만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좀 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렇지만 충분히 자신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평범한' 여성들이 작품 내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맞이하는 여성의 삶, 생활, 생리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루는 창작물들 꽤 많다. 영화로는 혹성탈출 시리즈부터 해서,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루는 월드워Z 라던가, 기타 등등. 소설이나 만화책에서도 자주 주제로 다루어진 것이 아포칼립스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많은 아포칼립스 주제의 창작물들을 보며 여성의 삶을 면밀히 다룬 작품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가령 이런 것, 좀비가 집 밖에 진을 치고 있어 나는 밖을 나갈 수 없는 상황인데, 이때 생리가 터진다면? 쓰나미가 지나간 후 아비규환인 생존터에서 생리가 시작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창작자들이 일부러 넣지 않은 것인지, 이런 것들은 너무 하찮고 사소한 것이라 내용 진행에 필요 없어 빠진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생리'는 재난 상황에서 매우 끔찍하게 작용할 것은 틀림이 없다. 재난 상황에서 생리를 한다는 것은, 감염의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세븐시즈>에서는 생리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는 물론이고, 생리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위기를 겪기도 한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소소함이 내용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읽으면, 나의 상상력도 즐거워진다.
생리뿐만이 아니다. 이 책에는 임산부도 등장한다. 그 어떤 의료기술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신과 출산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야말로 페미니즘을 작품에 잘 녹여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만화책이 강간을 대하는 자세
이야기는 청소년들이 중심이다. 물론 잘 '선별된' 청소년들이긴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는 이들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은 '하나'를 여름A팀의 '안고'가 강간하려다가 미수에 그치며 커져간다. 실제로 강간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안고'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그는 성장기에 가혹한 상황에 내몰려 자라왔고, 그래서 사회성이 미처 성장하지 못한 채 미래에 도착했다. ('안고'뿐만이 아니라 여름A팀 전부가!) 또한 '안고' 역시 자신의 팀에게만큼은 한없이 자상하고 리더십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여성을 가장 상처 입힐 수 있는 방법-강간-을 실행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그를 감싸지 않는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딱 잘라서 말한다. 그의 성장기를 가혹하게 만들었던 가해자 앞에서는 그를 옹호하는 한편, 그의 행위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한 건에 대해서는 그가 뉘우치고 사죄할 수 있도록 대한다.
강간은 누구에게나 끔찍한 기억이다. 그 사후 처리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전적으로 피해자의 결정에 달려 있어야 하고, 누구도 피해자에게 용서를 종용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완결을 맞이한 <세븐시즈>에서는 강간 사건을 교과서적으로 해결한다. 가해자는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지만 피해자는 트라우마가 너무 크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눈에 띄지 않기를 요청한다. 피해자와 가해자 주변인들 누구도 피해자의 탓을 하지 않으며, 용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를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어 보시기를 정말 강력히 추천합니다!)
만화책이지만 읽고 생각할 여지가 매우 많다. 물론 재미도 있다. 읽으면서 감정 이입도 굉장히 잘 되는 편이라서 여러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엉엉 울었다. 완결이 났으니까 정주행을 정말 추천하고 싶다. 타무라 유미의 <바사라>역시 강력 추천!
P.S. 개인적으로 겨울팀의 유일한 생존자 아라마키 타카히로가 정말 취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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