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군

by 희연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B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는 내게 영향을 주었던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섞어 넣은 가공의 인물이다.


우리는 중학생 시절에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서로를 알게 되었다. 우연찮은 기회에 펜팔을 시작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진 사람은 그 한 사람뿐이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서로를 애틋해하고 그리워했다. 사진 같은 것을 교환해 본 적은 없다. 우리가 나누었던 것들은 직접 찍어 인화한 사진이나 그림, 엽서, 그리고 각자가 지어낸 이야기들 뿐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모른 채 이렇게 감정이 짙어지는 새로운 경험도 해본다. 우리는 많은 면에서 비슷했고, 의외의 부분에서 달랐다.

B군은 서울에 살았고, 초반엔 사소한 오해로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애칭 같은 것을 만들어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그의 이름 그 어디에서도 알파벳 B를 추출해 낼 수 없었음에도 나는 그를 B 군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달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내게 태양 같은 존재였고 나는 그에게 달과 같은 존재였다. 나의 가장 어두운 시절을 밝게 비추어주었던 사람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교우관계가 좋지 못해서 겉돌게 된 나를 잘 잡아준 것은 언제나 B 군이었다. 그 당시 휴대폰이 생겼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번호를 교환하지 않았고 여전히 편지만 주고받았다. 그리고 나는 어차피 고3이 되자마자 휴대폰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숫자로 된 연락처는 의미가 없었다. 가끔 급한 일이 생겨 당장 그의 위로가 필요할 때면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곧장 답장으로 내게 필요한 말들을 해주었다.


그는 박민규 소설을 좋아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유치하고 진부하다 말했다. 고전소설을 정말 좋아했는데 그중 쥘 베른이 가장 훌륭한 작가라고 늘 칭찬을 했다. 나는 그의 영향으로 쥘 베른 소설 몇 가지를 읽게 되었고 그중에 선 달나라 여행과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B군은 영화도 좋아했다. 영화라면 거의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었다. 어떤 때는 좀비가 나오는 공포영화만 잔뜩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슬프고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들로 하루를 꽉 채우기도 했다. 그는 한 번 봤던 영화를 두 번은 보지 않았다. 세상에 모든 영화를 보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이미 봤던 것을 또 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는 함께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같이 봐주곤 했다.


우리가 실제로 처음 만난 것은 스무 살 때였다. 편지를 주고받은 지 거의 5년만 이었고,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덕분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두 번째 수능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았던 때보다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그만두면서부터 혼자 살고 있었다는 것과 (주소가 바뀐 건 알았지만 혼자 살게 되었을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의 엄마를 여태 한 번 본 적 없다는 것, 그리고 종종 언급되었던 여동생은 엄마가 다르다는 것.


B군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내 소설의 문장들을 다듬어주었고, 내가 보는 영화들의 폭을 넓혀주었는데 이젠 어떤 것이 그의 취향이고 나의 취향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서로에게 책 선물을 많이 했고 좋아하는 음악들을 함께 들었다. 내가 학생운동 문제나 학생회 문제로 어려워할 때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고 항상 응원한다고 말해주었다. 연애 문제로도 상담을 많이 했다. 나는 그의 여자 친구들을 질투하면서도 그가 여자 친구와 잘 지내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 역시 내가 연애를 잘해서 행복하면 좋은 거라며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내가 연애했던 남자들은 대부분 B군을 질투하며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 고 말하곤 했다. 물론 우리 사이에 로맨틱한 감정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그를 영원한 나의 영혼의 동반자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섣불리 연애 같은 걸 그와 시작했다가 어설픈 다툼으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만나면 늘 손을 잡고 걸었고, 만나고 헤어질 때 항상 포옹을 했으며 가끔 술을 마시고 키스도 했다. 섹스를 할 뻔한 적도 있지만 우리는 너무 취해있었고 그냥 잠에 빠져버렸다. 그 이후로 우리는 각자의 섹스에 관한 이야기는 했지만 '우리의 섹스'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애초에 해 본 적도 없었던 주제였지만.


B군이 군대에 있었을 때 난 학교에서 학생회장을 학과 학생회장으로 1년을 보낸 후 휴학을 했고, 그가 제대를 했을 때 나는 호주 어학연수를 몇 달 다녀왔다.

B군은 이문동에 살았다. 군대에 있던 약 2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문동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은 휘경동이었던가?


내가 졸업을 하고 부천에서 1년 살던 때에도 우리는 두세 달에 한 번씩은 꼭 만났다. 연락은 거의 매일 주고받았다. 바쁠 때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통화를 했다. 내가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사이에 그는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는 재수를 해서 고려대 경영학과를 들어갔지만 학비 문제로 더 다닐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며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공무원 시험 같은 걸 준비할까 하고 있었다.


내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후에 고향에서 1년 정도 시간을 보냈는데 그동안 그는 딱 한 번 나를 보기 위해 내 고향에 방문했었다. 부산여행 중에 들렀던 것이라 반나절 정도 시간을 보냈던 게 전부였다. 내 워킹홀리데이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올까 생각 중이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의 실연을 다독여주며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안아주었다.


내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 우리는 두 어 번 만났다. 내 일상도 그의 일상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자 했지만 많은 평범한 이들이 그렇듯 '각자의 삶이 바빠서' 마음으로만 그리워했다.


그는 4월 30일, 자살사고로 나의 곁을 영영 떠났다. 그의 생일은 5월 3일이고 나는 그의 생일에 주기 위해 샀던 선물들과 썼던 편지를 태웠다.

아직도 고향집엔 그와 나누었던 편지들과 그에게서 받은 크고 작은 선물들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하면서 울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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