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P. 277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 소설집 <19호실로 가다>에는 총 11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처음에는 독서 모임에서 읽기로 한 마지막 단편, <19호실로 가다>만 읽었다가, 나머지를 다 읽게 되었는데 단편 각각이 가지는 다양한 매력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19호실로 가다>는 인간이 가지는 절대 고독에 관한 이야기였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다. 감추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왜냐고 물어보면, '그냥'이라고 대답하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그냥이 어딨어?"하고 되물어 온다. 나도 '그냥'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는 기분인데.
사람은 누구나 그런 고독을 가진다. 언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다. 그리고 그걸 해소하는 방법은 각자 다르다.
수전 롤링스는 자신이 가진 고독을 '19호실'에서 견뎠다. 남편인 매슈는 차라리 수전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이길 바랐다. 왜냐면 그게 아니고서는 수전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만나면 사람은 공포를 느낀다. 매슈는 수전을 두려워했다.
수전은 결단을 내린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만이 자신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오롯이 자기 자신일 수 있는 '19호실'에서 영원히 머무르기로 결정한다.
P. 318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 여기서 그녀는 네 아이의 어머니, 매슈의 아내, 파크스 부인과 소피 트라우브의 고용주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친구, 교사, 상인 등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정원이 딸린 크고 하얀 집의 안주인도 아니고, 이런저런 행사에 딱 맞게 차려입을 수 있는 다양한 옷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존스 부인이고 혼자였다. 그녀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옥상 위의 여자>
실제 세계의 강간은 보다 교묘하게 이루어진다.
아마 그렇게 이름 붙이기 어려운 미묘한 폭력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겪은 가해도 그러했고, 어떤 사람들이 겪은 가해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피해자라고 말하기 애매한 사람이 되었고, 가해자를 가해자로만 지목할 수 없는 기묘한 상황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강간 가해자들의 심리가 이 단편에 잘 묘사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레이엄은 명백한 성희롱/성폭행을 저질렀고, 바버라는 예의 바른 피해자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그레이엄과 바버라가 세상에 있다.
P. 53 '내 쪽에서는 전혀 욕망을 느끼지 않는데도 굳이 날 취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요. 그러고도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해자인 그레이엄 편에서 진행된다. 그게 바로 킬링 포인트가 아닐까.
<옥상 위의 여자>도 별반 다르지 않다.
P. 72 밤마다 꾸는 꿈 덕분에 그는 그녀가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혹시 그녀가 톰에게 자기 아파트로 가자고 청하지 않을까?
뇌내망상에 빠져 한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염없이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서만 바라본다. 이런 꼴이 우습게 읽힌다면 이 미묘한 폭력의 굴레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단편집의 작가인 도리스 레싱은 1960년대 시대적 이슈를 다루었다. 단순히 페미니즘을 이야기한 작가라고 하기에는 스펙트럼이 조금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짧지만 강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는 또다시 소설이 쓰고 싶어 졌다.
Copyright. 2019. 윤해후.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