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D+1
14. D+1
시차 적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토론토에 도착한 날 밤 잠을 아주 푹 잘 잤다.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도 너무 일찍 일어나 버린 것이다. 해가 밝아오는 시간에 맞춰 아침 5시 반쯤 눈이 떠졌다. 임시 숙소로 머무는 곳은 19층이어서 해가 일찍 들어오는 걸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미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첫날부터 바지런히 움직여 동네를 돌아다녀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머릿속에 차례로 정리했다. 휴대폰을 개통해야 했고 계좌를 개설해야 했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합법적으로 일하는 데 필수인 SIN 넘버를 신청하는 것도 할 일 목록에 올려 두었다.
SIN 넘버라고 부르는 게 웃기다는 생각을 했다. SIN 자체가 Social Insurance Number(사회 보장 번호)의 줄임말인데 여기다가 '넘버'를 또 덧붙여 부른다. '역전앞'같은 거구나 싶었다.
SIN 넘버는 가까운 서비스 캐나다 Service Canada 지점을 방문해 신청할 수 있었는데, 구글 지도로 확인해 보니 거주지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내친김에 가까운 은행 지점도 검색해 봤더니, 서비스 캐나다 근처에 TD Bank 지점이 하나 있었다.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려보고 집을 나섰다.
지도만 보고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은 '걸어서 30분'이라는 거리가 생각보다 먼 거리라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도 걸어서 30분 거리는 대게 대중교통을 이용하곤 했으니, 생각을 못 할 수가 없었는데 왜 캐나다에서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지하철로 두 정거장, 이쯤은 걸어갈 수 있지, 라고 자신만만해했던 것 같다. 고향에서는 걸어서 30분 거리는 늘 걷는 거리였기도 했으니까.
문제는 8월 중순, 오전에서 한낮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는 데 있다. 토론토의 여름도 여름이라는 것. 오히려 햇볕 자체는 한국에서보다 더 따갑고 뜨거운 느낌도 들었다. 처음에는 '이게 바로 캐나다의 모습이구나!'하고 연신 감탄하며 걷다가 점점 더위에 지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쯤, 서비스 캐나다에 도착할 수 있었고 더욱이 이른 낮에 방문한 덕분에 대기 없이 SIN 넘버를 신청할 수 있었다. 신청하는 데는 여권과 비자가 필요했는데, 이 외에도 현장에서 부모님 이름 모두를 적어달라고 한 것이 신기했다. 부모님의 이름 영문이 여권에 어떻게 적혀있더라, 이게 여권상의 영문명과 다르면 문제가 될까? 몇 가지 사소한 질문이 떠올랐지만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적어냈다. 담당자도 단순히 확인용이니 고심할 필요 없다고 넌지시 말해주기도 했고.
신청 절차가 끝났고, SIN 넘버는 나중에 우편으로 서류를 통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첫 번째 미션을 클리어하고, 바로 머릿속에 좌표를 찍어둔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원한 건물 안에 앉아 일을 처리한 후라 걷기가 한결 편해서 은행까지 가는 길이 힘겹지 않았다. 서비스 캐나다와 TD Bank 지점이 멀지 않았다고는 해도 5분 정도 걸어야 했다.
은행에서도 대기 없이 빠르게 상담원과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아 계좌 개설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학생 비자와 여권을 꺼내니, 담당 상담원이 학생 계좌를 개설할 것인지 묻고 바로 진행해 주었다.
계좌 개설을 진행해 준 상담원은 이란에서 온 여성이었다. 계좌를 개설하는 데는 전산상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시간이 좀 걸렸는데, 덕분에 진행하며 상담원과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캐나다는 처음 온 것이냐, 왜 캐나다로 오게 되었나, 하는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무심코 한국의 여성 혐오적인 환경이 진절머리 나서 떠났으며 좀 더 나은 곳에서 살고 싶어서 왔다, 고 대답했다. 상담원은 자기도 그런 이유로 이란에서 캐나다까지 오게 되었다며 크게 공감해 주었다. 각자의 나라 남자들 흉도 함께 봤다. 나는 '한국 남자랑 절대 데이트하지 말라'고 했고 그는 '이란 남자는 무조건 피해라'고 해서 우스웠다.
공통적으로 여성 인권이 낮은 편에 속하는 나라에서 온 우리 둘은 이상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친절한 상담 덕분에 즐거운 대화로 계좌 개설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세 번째 미션인 휴대폰 개통을 하러 몸을 움직였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 휴대폰 대리점 같은 곳으로 갔는데 마침 상담원이 한국 분이었다. 친절하게도 어떤 요금제로 개통할 수 있는지, 현재 진행 중인 행사는 어떤 게 있는지 잘 설명해 주셨고 덕분에 헤매지 않고 휴대폰 개통도 무사히 마쳤다.
휴대폰 개통을 한 건물에 홀푸즈 마켓 Whole Foods Market이 있어 그곳에서 간단하게 장을 봤다. 처음 보는 마트였지만, 그냥 마트와 다를 바 있겠어? 하는 생각에 무심코 발을 들였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다른 마트에 비해 조금 더 비싸고 유기농 위주의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전체 내부 구성은 특이한 것 없어 보이는 보통의 마트 같았지만, '캐나다의 일상'을 체험하듯 마트를 구경하는 게 하나의 재미였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즐거웠다.
한국에서도 매번 장 볼 때마다 조금만 사야지, 조금만 사야지, 하지만 막상 계산을 마치고 나면 늘 두 손이 무거워지곤 했는데, 그 버릇을 한국에 두고 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가볍게 장 보려던 게, 양손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이대로는 왔던 것처럼 걸어서 돌아갈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하릴없이 돌아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TTC와 나의 첫 만남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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