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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 김소영

by 희연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열두 살이던 초등학교 5학년 때, 소설 <해리포터>를 접했다. 소설 속 해리는 나와 동갑인 아이였고, 여러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마법사 세계에 입문했다. 그때 나는 해리와 나를, 론과 나를, 허마이오니와 나를 동일시했고 나도 언젠가는 부엉이가 가져오는 마법학교 입학 허가서를 받을 수 있을 거라 꿈을 꾸곤 했다. 이 꿈은 중고등학생이 되며 모양이 변했고, 내 일기장에는 이제 호그와트 대신 '옥스퍼드/케임브리지'가 적히기 시작했다.

<어린이라는 세계>에 소개된 하윤이의 꿈을 보는데, 나의 어린이 시절과 겹쳐서 너무 놀랐다. 그때의 내 꿈을 당시 담임선생님은 응원해주셨지만, 엄마와 아빠는 그게 어딨는 덴지는 아냐며 비웃었던 탓에 어쩐지 다른 어른들에게 이 이야기를 더 이상 하기 꺼려졌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나는 옥스퍼드도 케임브리지도 못 갔지만 중학교 1학년 때 다녀온 영국 어학연수에서 옥스퍼드 캠퍼스를 구경할 기회를 가질 수는 있었고, 더 자라서는 홀로 호주도 다녀왔고 이제는 캐나다에서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버는 어른이 되었다.


P. 21. 하윤이는 지금 거의 옥스퍼드(또는 케임브리지) 교정 한가운데 있다. 어린이의 허세는 진지하고 낙관적이다. 그래서 멋있다. 결정적으로 그 허세 때문에 하윤이가 옥스퍼드(또는 케임브리지)에 갈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다 건너까지 유학을 가겠는가.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내가 선언한 대로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꿈을 꿨던 어린 내가 있던 덕분에 지금 이만큼 자란 내가 있구나. 내 어린 시절을 보듬는 위로의 말을 잔뜩 읽은 기분이다.


<어린이의 세계>는,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이 책을 읽은 모든 어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어린이를 치유해주는 책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거나 혹은 주변의 어린이들을 다시 한번 더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더불어 어린이를 키우는 양육자 친구들이 많이 생각났다. 이 책이 육아 지침서로 읽혀서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큰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다는 위로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뉴스를 보면서 지치고 힘들어지는 때가 많고,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어떻게 더 낳아 기르라는 말이냐, 하고 울분을 토하고 싶어 지는 순간이 많았다. 이 책에서 희망을 읽었다고 하면 오버일까?


P. 168-169. 사회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으니 주지 않겠다고, 벌주듯이 말하면 안 된다. 이 말은 곧 사회가 자격이 있으면 상으로 아이를 줄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린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말은, 애초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그 끝이 결국 아이를 향한다. 아이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된다. 미래에만 해당하는 말이라면 괜찮을까? 미래의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정되는 것이다. (중략)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희망이 혼내는 소리에 내가 무심하게 내뱉었던 과오들을 곱씹어 봤다. 캐나다에 오기로 마음먹었던 이유 중 하나가, 한국처럼 아이들에게 가혹한 환경에서는 내 아이를 낳아 기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는 어린이를 가질 자격이 없으니 쥐어주지 않겠다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을까, 반성해봤다. 백 프로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약간의 변명을 덧붙이자면 내가 키울 아이에게는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고 하고 싶다.

한국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어린이-청소년을 가르치던 때를 자꾸만 회상했다. 처음에는 그들을 나도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 하나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어른들로부터 '덜 자란 사람' 정도의 취급을 받아오던 아이들은,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취급을 너무 낯설어했다. 동시에 그때 내가 더 노력해볼 걸, 하는 후회도 슬그머니 들었다. 존댓말을 쓸지 반말을 쓸지, 어떻게 존중을 표현할지 좀 더 고민해볼 걸, 아쉬움이 일었다. 이 책이 더 일찍 나와서, 그래서 내가 더 일찍 읽었다면 내가 지금보다는 더 나은 어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곳곳에 떠올랐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앞으로 마주하는 어린이들에게 좀 더 섬세한 친절을 건넬 수 있는 어른이 되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부분 중 하나는, 어린이들의 정치성이었다.


P. 181-182. 어린이의 직관은 무엇을 꿰뚫어 보는 신통한 능력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힘이다. 늘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뭘 모르는 게 아니다. 모를 수가 없다. (중략)
어린이는 정치적인 존재다. 어린이와 정치를 연결하는 게 불편하다면, 아마 정치가 어린이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 보기에도 민망하고 화가 나는 장면들을 어린이들에게 보이기 싫은 것이다. 그런 문제일수록 어린이에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어린이는 그런 어른들의 모습까지도 볼 것이다. 달아날 곳이 없다.

1960년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거리에는 10대-20대 청/소년들만 쏟아져 나왔던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이들도 그 자리에 있었고, 민주화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가 희생되기도 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아마 영영 모르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그대로를 보기에 오히려 명확한 답을 보는 어린이들이 있다. 지금도 미얀마의 거리에서 옳은 답을 외치는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을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어른들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정답을 말해 어른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어린이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떠올려본다. 자기가 말한 정답을 행동으로 옮기는 어린이들도 여럿 생각난다. 우리는 그런 어린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건 아닐까.


어린이의 어린이다움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어른이 좀 더 어른다워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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