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Thick
트레시 맥밀런 코텀
나에게 책 읽기란 단순한 취미활동을 넘어선다. 어릴 적에는 책 속에 펼쳐져 있는 다양하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상상력을 자극하며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좋아서 자주 빠져들곤 했다. 중, 고등학생 때는 그야말로 학교 공부에서 도피하기 위해 소설책에 많이 빠져들었던 것 같다. 스무 살이 되고 '어른'의 타이틀을 달면서 습관처럼 남아있는 책 읽기를 취미라고 말하곤 했지만, 실은 책 바깥의 세상이 더 재미있었던 모양인지 10대 시절보다 책과 가깝게 지내진 않았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는 다시 매일 책 읽는 데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 의무감처럼, 책을 읽지 않으면 도태될까 봐 떠밀려서 읽는 시기도 지나왔다. 이제는 책을 읽으며 내가 모르는 세상을 알아간다.
독서모임을 하며 늘 부족하다 여겼던 것이 여성 작가의 작품을 탐독하는 것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소수자성이 더 강한 작가들의 작품은 영 찾기가 어려웠다. 찾으려는 노력을 더 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겠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은 정말 찾기가 쉽지 않았다.
트레시 맥밀런 코텀. 작가의 이름부터 낯설었던 이 책은, 한국어로 된 제목 <시크>만 봤을 땐 소위 시크하다고 하는 시크Chic를 먼저 떠올렸다. 그러다 책 표지에 길게 늘어진 H와 함께 있는 Thick를 보고서는 책에 마냥 두꺼울까 걱정이 들었다. 덥썩 읽겠다고 도전했는데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처럼 두껍고 무거운 책이면 어떡하지?
걱정은 어느 정도 사실이 되었고 첫 챕터는 고구마를 삼키는 듯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 인종, 아름다움과 자본주의를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건네는 저자의 속삭임이 어떻게 마음을 끌지 않을 수 있을까. 나 역시도 여성이고, 캐나다라는 백인이 주류를 차지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아시안이며,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인 것을.
트레시 맥밀런 코텀은 흑인 여성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참 이상하게도 아시안 여성에게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P. 161 흑인 소녀가 희생자로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 답을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깊이 사랑하는 남자들이 내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왔는지는 잘 알고 있다. 내 친구들은 일단 남자가 여자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원하면, 그 여자는 더 이상 희생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내 사촌은 일단 창녀가 되면, 그 여자는 희생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희생자성'을 강요당한/당하는 성폭력 생존자들의 모습이 수없이도 떠올랐다. 나 또한 성폭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나의 피해사실을 꺼내 가해자를 공격하거나 온전히 피해사실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던 걸 기억해냈다. 왜 그러지 않았냐 하면, 피해사실을 내가 끊임없이 증명해 내야 하고 그 과정에 발생하는 2차 가해도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것을 포함해, 너는 '피해자답지 않다'는 말이 나를 어떻게 공격할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나와 나의 자매들에게도 일어났던, 일어난 일이고,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다.
에세이, 수필의 장점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개인의 이야기지만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사회를 관통하는 쟁점을 던지는 것이다.
P. 23 사적인 에세이가 문화적으로 저급한 취향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장르의 수많은 글들이 본질적으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트레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계속 쓴다. 흑인 여성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가 모든 흑인 여성들의 삶인 것은 아니다. 내가 아시안 여성으로서, 내가 가진 소수자성을 드러내는 글을 쓰더라도, 소수자의 서사가 될 수는 있지만 모든 소수자의 서사가 나의 서사와 같지 않은 것처럼.
그럼에도 그 중심을 꿰뚫는 동일한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사적인 에세이는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캐나다에 오고서도 사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국인 친구들과 주로 어울려 다니곤 하다가 새로운 커뮤니티에 유입될 가능성을 엿보기도 전에 코로나로 모든 것이 멈춰버린 세상에 남아버렸다. 그런 탓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릴 기회가 없어서, 다양성의 도시라는 토론토에서도 그걸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꼭 특정 인종의 친구를 사귀고 싶다거나, 친구 그룹에 다양성을 부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세계가 좁아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다양한 인종의 친구를 만들고 싶었다. 그들이 해주는 그들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나의 이야기도 전하며 서로의 세상을 알아가고 싶었다.
캐나다에 처음 와서 은행 계좌를 열 때 나를 담당한 텔러는 이란에서 온 여성이었다. 우리가 떠나온 곳은 다르지만 여성이라는 공통분모가 서로의 마음을 쉽게 열어주었다. 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토로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했다.
흑인 여성의 삶이 어떤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렇게 책으로나마 읽는다. 그 속에서 공감대를 엮어 나간다. 그들의 삶이 내가 가진 삶과 아주 다르지만은 않다는 걸 배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가지는 인종적 특성 때문에 일어나는 특수한 차별에 대해서 배운다. 그렇게 내 세계를 조금 더 넓혀간다.
P. 171 우리는 집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남성들의 공격에 가장 취약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하도록 배웠다. 목소리를 내면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진다. 게다가 흑인 여성과 소녀들은 흑인 남성과 소년들의 평판을 보호해야 하는 짐까지 추가로 떠안아야 한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듯, 그 짐은 우리를 침묵의 문화 속에 가둬버렸다.
형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흑인 남성, 소년들은 인종적으로 쉽게 프로파일링이 된다. 인종차별과 맞닥뜨리는 최전선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들도 언제든 성차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또는 저들보다 더 소수인 인종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평면적이지 않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인종과 성별, 나이와 계급, 계층 등 다양한 요소들을 적용하면 문제가 단순해지지 않는다. 흑인 남성이 아시안 여성을 폭행하는 사건이 근래 왕왕 뉴스거리가 되어 올라오는데, 이를 인종 차별의 문제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아시안 여성으로서 인종 차별에 기인한 폭행을 당했다 말할 수 있는 지점이니 다행이라고 할까. 흑인 여성들은 흑인들을 향한 인종적 편견이 더 커질까 봐, 친밀한 사이의 흑인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을 눈 감아 주게 된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본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 쓰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고심한다. 다음 책에서는 어쩌면 답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고유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동료 여성들의 서사를 더 많이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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