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연 May 29. 2021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 천선란 외

우리는  별을 떠나기로 했어

천선란, 박해울, 박문영, 오정연, 이루카


공상 과학 소설은 어릴 적부터 줄곧 나에게 낯선 장르였다. 판타지, 무협 소설은 차라리 읽기 쉬웠던 게, 작가가 오롯이 창작한 세계관 속으로 그저 쫓아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지만, 공상 과학 소설은 어딘가 묘하게 현실이 들어가 있어 상상력 만으로 읽히는 건 아니었다. 낯선 과학 용어들, 어려운 단어들이 쉴 새 없이 지면을 뛰놀았고 그 속에서 종종 길을 잃곤 했다.

그러다 서점 한 구석에 비치된 작은 책자 속에 실린 김초엽 소설가의 <관내 분실>을 발견하고, 선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단번에 읽어냈다. 그의 단편 속 세계는 난해하지도 않았고 낯설긴 했지만 매력적이었다. 그 후로도 2년이 지나서야 그의 단편집을 읽게 되었고 나는 그 세계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생각해보면 즐기지 못할 것도 없는 장르였다. 그런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즐겨보던 미국 드라마 <The 100>의 마지막 에피소드 감상을 동시에 마쳤다.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드라마 속의 인물, 상황이 많이 겹쳐 보였고 덕분에 조금 더 쉽게 활자 속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천선란의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는 김초엽의 <스펙트럼>을 연상케 했다. 이질적인 두 존재의 대화. 누구의 언어도 아닌 어떤 간절함으로 이루어지던 소통과 연대. 초반엔 조금 어렵게 느껴졌지만 읽을수록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고, 읽은 후에는 여운이 남았다.


P. 24 죽음보다 더한 죽음이 있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죽음은 단일한 것. 죽음으로 가는 길이 수백만 갈래라고 하더라도 죽음은 단 하나의 점. 그 점은 갈라지지 않을 거라 믿었죠. 하지만 틀렸어요. 우주는 아직 인간이 겪지 못한 죽음을 끌고 왔죠. '완벽한 소멸'이라는 형태로요.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던 나에게, 이 이야기는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세상에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마음을 터놓을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때도 있다. 아마 이인도, 나나라 이름 붙여준 '그것'과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둘의 소통은 서로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것 같다.

나나 역시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홀로 외딴곳에 남기로 선택하기까지, 자기 자리를 찾느라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았을 거라 쉽게 짐작이 갔다. 이인을 마주하고 그를 돕기로 했을 때도, 이인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기에, 자기 자신도 상처를 딛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박해울의 <요람 행성>은 잔잔하고 단단한 울림을 가진 이야기였다.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지는 연대기도 물론 좋았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분명 지구는 기후 위기를 겪고 있다. 우리는 지구를 상처 내는 데 안달 난 사람처럼 군다. 비건을 지향하자고 마음먹은 지 수 해가 지났지만 내 식단에 큰 변화가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을 정도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내가 하루 고기 안 먹는다고 환경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는 무력감을 자주 느꼈다. 그러다 이 이야기를 읽고는, 무력감에 지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그냥 내 상상력 너머로 던져 버렸다. 그러니까 수현이 돈을 많이 벌어서, 아무도 갈 생각을 하지 않은, 리진이 홀로 생을 마감하고도 십몇 년을 들여다볼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았던 그 행성으로, 자유롭게 다닐 있게 된 세계 속으로.


박문영의 <무주지>에 등장하는 클론의 이야기를 읽으며, 클론으로 태어나는 건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태어나기를 누군가의 복제품으로 태어나면, 아마 평생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지할 것인지, 존재론에 대한 고민에 빠져 살게 되지 않을까.

무주지 속의 세계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리게끔 했다. 비독점 다자 연애 관계를 지향하는 세계, 여성이 임신과 출산, 육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세계. <멋진 신세계>에서는 이상적이고 멋지게 들렸는데, <무주지>에서는 왠지 황량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멋진 신세계>도 결국 '유토피아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던가. 그래도 <무주지>에서 두 클론, 연음과 기정은 둘만의 보금자리를 찾아낸 것 같아서 살짝 기뻤다.


P. 118 지구가 열악한 행성이 된 이유를 기후 변화 때문이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그건 누군가 죽은 이유를 심정지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니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했다. 지구가 열악한 행성이 될 때까지 누가, 어떻게 살았나. 왜 그렇게 지냈나.

<무주지>는 생각할 지점을 여럿 던져 주었다. 다자 관계, 공동 육아, 개척지로 클론을 보내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모종의 목적으로 클론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클론에게 육아를 전담하는 것에도 문제는 없을까? 그러고 보니 양육에서 멀어진 '인간'들이 아이를 낯설어하며 회피하는 것을 보면, 노 키즈존 운운하는 한국 사회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오정연 <남십자자리>는 여운이 가장 길게 남은 단편이었다. 다 읽은 후 전자책을 슬립모드로 바꾼 다음 한참을 눈물을 뚝뚝 흘렸다. 김초엽의 <관내 분실>을 읽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살기보다는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삶을 선택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네가 기억해달라며, 그래도 같이 달의 뒤편을 보았던 건 잊지 않았노라고 말한다. 프롬의 <달의 뒤편으로 와요>라는 노래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도 설명되지 않은 부분은 있었다. 감동의 폭풍에 휩쓸려 하마터면 잊고 지나갈 뻔했던 오류, 휴머노이드의 오작동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소설이 마무리되었다는 것. 다시 상상력으로 엉성한 부분을 채웠다. 휴머노이드에게도 새로 쌓이는 더 좋은 기억들을 선물해주기로 했다.


마지막 작품, 이루카의 <2번 출구에서 만나요>는 제일 난해하고 어려운 소설이었다. 주파수와 공명. 외계 신호를 받아서 혐오의 주파수를 전송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보냈던 그 혐오 주파수를 돌려받는다. 연대와 공감의 신호를 가진 이에게는 연대와 공감의 손을 다시 내민다.

안타깝게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이 정도였다.


작가들의 창작 후기글을, 책을 다 읽은 다음에 다시 한번 읽었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1148854&memberNo=5235722&vType=VERTICAL

읽었던 내용 속에서 작가의 의도를 다시 헤아려봤다.


제일 고무적이었던 지점은, 등장인물들의 성별이 쉽게 특정되지 않게 쓰였다는 것이었던 것 같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호했던 등장인물들과, 읽으면서 엄마와 딸의 관계인 걸 파악하고, 또한 혈연관계를 넘어선 세대가 다른 여성 간의 연대를 곱씹는 일련의 과정이 즐거웠다.






Copyright. 2021. 윤해후. All Rights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 유선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