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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Sep 08. 2022

보통 맛 - 최유안

보통 사람의 보통 이야기

보통 맛

최유안


보통 사람의 보통 이야기

불의에 발 벗고 나서서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될까. 나에게 피해가 올 걸 알면서도 타인을 돕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보다는 내 알량한 시간이나 돈을 아끼는 데 더 공을 들이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그저 보통 사람일 뿐이다.

최유안의 <보통 맛>은 내 안의 '보통 사람'을 자꾸만 소환한다. 나는 정의롭고 굳센 사람이고 싶은데, 사실은 그의 소설에 나열된 나약한 소인배와 다를 바가 없다. 굳이 '소인배'라고까지 폄하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내게 없길 바라는 내 안의 평범한 어둠을 조명해 "너도 그저 사람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단편 소설을 읽으면서 온갖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본게마인샤프트 ]

독일에서 유학하며 공동체 숙소 생활을 하는 '혜령' 1인실을 원했지만 어쩐지 '동양인'이라는 카테고리라 함께 묶인  같은 중국인 룸메이트 '' 처음부터 삐그덕거리며 시작한다. 자신은 인종차별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서도 '' ''이라고 부르거나 '스테파니' '멜라니' 굳이 구별하려 들지 않는  선입견으로 상대를 바라보기를 서슴지않는다. 스테파니가 자신을 이해하고 화해하려는 제스쳐를 취해도 그때만 잠시일 , 결국 자신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를 하는 상대방에게 먼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캐나다에 살기 시작하면서 혜령과 같은 사람을 참 많이 봤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봉쇄령이 시작되고, 동양인을 향한 무차별적인 인종차별 공격이 들어오가 시작했을 때 더욱 빛을 발했다. 혜령의 모습에서,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혐오 발언에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야!"라는 말로 응수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비단 그뿐이 아니라, 어느 동네는 특정 나라에서 온 사람이 많아서 냄새나고 더럽고 위험한 동네라는 말을 한다거나,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발음은 못 들어주겠다던가 하는 말은 너무 흔해서 일일이 지적해주고 싶은 마음조차도 들지 않을 정도다.

내 안에도 그런 혜령의 모습이 분명 있을 것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사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다양성'이라며 자랑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내 안의 인종차별과 싸운다. 저 사람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 나라 사람이라서가 아니야. 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다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야. 조금만 방심하면 달콤하고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인종차별주의자가 미소를 짓게 되니 뇌에 힘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혜령이가 되지 않으려 할수록 내 안의 혜령이 모습은 더 선명해진다. 어쩌면 그렇게 선명해져야만 비로소 마주하고 똑바로 바라보고 그래서 잘못을 고쳐나갈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내 안의 차별주의자를 혜령이의 모습으로 꺼내 준 이 작품이 참 귀하다.


[ 내가 만든 사례에 대하여 ]

난민의 이야기를 이렇게 다양한 각도로  수도 있었다. 국제 공조로 난민의 자립을 도운 사례를 논문 주제로 잡고 연구를 하던 ''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례를 마주하지 않고 미리 만들어  결론으로 자신의 사례를 유도한다. 그렇지만 '' 사례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었고, '' 결말과는 다르게 다시 난민 캠프로 돌아가, 자신이 받았던 도움을 베풀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난민의 이야기는 마냥 시혜적으로만 바라볼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적대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되는 미묘한 부분이 있다. 그저 그런 장소에서 그런 시기에 태어났을 뿐인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주체적으로 노력하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쳐 생존한 것인데, 나는 여전히 이 단편 속의 '나'처럼 시혜적인 시선으로밖에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니,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불쌍한 사람,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

하지만 '나'의 실패한 사례처럼, 그들은 마냥 불쌍하거나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난민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야 할 뿐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생을 살 수 있도록. 어떠한 죽음도 '실패한 죽음'이 아닐 수 있도록.


[ 영과 일 ]

디지털 성폭력의 피해자를 내가 마주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나의 친한 친구라면, 내가 아끼는 사람이라면 나는 분명 발벗고 나설 것이다. 그가 생을 놓지 않도록 옆에서 같이 붙잡아 줄 것이고, 원하는 결말을 볼 수 있도록 함께 분노해 일어설 것이다. 하지만 내가 거의 알지 못하는 그저 같은 사무실에 존재할 뿐인 사람이라면? 그때도 내가 친구의 일인 것처럼 분기탱천해 앞장서서 보듬어 줄 수 있을까? 아마 그건 내 영역의 일이 아니라며 한 발 물러날지도 모른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지탱해 주리라고 믿으며.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를 나누다보면 N번방의 무수한 가해자들과 나는 다를 바가 없어지는 순간이 발생한다. 이 단편에 등장하는 '나'처럼, 단톡방에서 피해자의 영상이 공유되었을 때, 그것은 나쁜 짓이라고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하기보다는 가십처럼 함께 숨어 떠드는 순간. 나라고 그런 순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아마 내 생의 어느 순간엔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런 나의 모습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랬던 나를 외면하고 없었던 걸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상황에 놓여도 다른 대처를 하는 나로 변화, 발전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건 잘못 됐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가해에 가담하는 것이야."라고 분명히 말해야한다.


[ 해변의 닻 ]

어느 동네에나 '미친 여자'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여자가 거기서 그렇게 미친 채로 돌아다니게  연유에는 정말 온갖가지 소문이 낭낭한데, 진위를 아는 사람, 그리고  여자의 결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해변의 닻'에 등장하는 여자는 그런 '미친 여자'의 소문이 시작하는 지점이다. 아마 경찰들의 인계로 정신 병동에 잡혀가지 않았다면, 그런 소문이 되어 영원히 그곳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더 이상 그곳에 실체가 남지 않게 되었더라도 죽지 않는 소문으로 여전히 사람들 사이를 떠돌고 있을지도.

수연은 사람을 돕기 위해 경찰이 되었지만, 결국 '귀찮은 일'에 눈을 돌리고 '피해자'를 외면한다. 그리고 그건 동네의 '미친 여자'를 외면 했던 우리 모두와 같다.


[ 거짓말 ]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만 믿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본다. 인간 관계를 망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 마음만 편하다면 타인의 불편한 진심을 거짓으로 호도해도 되는 걸까?

'나'는 아이 문제로 여러 곳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고, 직장 생활에서는 눈총을 받으며, 남편, '윤호'가 커리어를 지키느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에 서운함을 느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거슬리는 건 사사건건 아이 문제로 감 놔라 배 놔라 훈수를 두는 앞집 쌍둥이 엄마인데, 이 와중에 임신을 했다가 결국 유산하고 만다. 쌍둥이 엄마의 진심을 거짓말로 호도하며, '나'는 그와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벽을 쌓는다.

나의 인간 관계들을 되돌아보며,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벽을 세웠던 날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자신의 기준에서 판단하고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을 사람들 속에서 나는 도저히 어울려 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말을 모두 입에 발린 말로 치부하고 거리를 두었다. 결과적으로 내 마음은 편해졌고 인간 관계는 협소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결론은 그렇게 난다. 아무리 마음이 '친해지고 싶어서'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느라 말을 함부로 했다지만, 역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과는 내쪽에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는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으로 남았겠지.


[ 보통 맛 ]

새로 온 직장 상사, 강현모 팀장과, 같은 팀 후배, 고은양의 비밀스러운 연애에 끼어있던 '나'는 결국 권고사직 당한 고은양에게 '보통 선배'로 기억되는 것이 슴슴하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기억되길 바라는 모양이다. 특히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에게라면 나는 특별하고 우러를 수 있는 '선배'이고 싶을 것이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그 알량한 권력에 도취되는 순간은 달콤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의 존재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은 그저 '보통 맛'에 지나지 않는다. 씁쓸함조차도 없는 감각이다.

이 단편의 흥미로운 점은 직장에서 일어나는 불륜 관계에 관찰자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선을 긋는 '나'도 결국 후배에게 알량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부분이었다. 팀장과 후배의 불륜을 가치평가 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은은하게 풍겨지는 지점도 퍽 재밌었다.


[ 심포니 ]

너무 다른 세 사람이, 세월이 지나 훨씬 달라져 버린 뒤에 다시 만나, 서로를 비교하며 '내가 그래도 쟤 보단 낫지'라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친구 관계를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이런 불협화음의 심포니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친구라면 자신과 비슷한 수준(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의 사람들이 어울리기 마련인데, 촘촘히 들여다보면 '그래도 쟤보단...'하는 마음이 없진 않을지도 모른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듯, 친구의 성공을 온전히 기뻐해줄 수 있는 것도 내 마음의 풍요가 이미 있어야 가능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친구여도 투기하는 마음이 드는 게 사람이지 않을까. 평소에는 열심히 숨기겠지만, 하긴 숨기지 않으면 친구 관계를 결코 지속할 수가 없겠지만.

하지만 나는 역시 아무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오롯한 행복을 찾는 사람이고 싶다. 특히 친구들과 나를 비교해서 나를 깎아내리거나 아니면 친구를 깎아내리는 마음이 전혀 없기를 바란다. 아직도 수양이 많이 필요하겠지만서도.


[ 집 짓는 사람 ]

너무도 한국의 마초 가부장에 부합하는 남자가 으스대며 집을 짓다 가족을 등한시하며 집에 집착한게 된다.

이와 비슷한 흐름을 보이는 우화들이 많았던 것 같다. 목표물을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아가다가 결국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잃게 되는 바보같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 이야기를 집을 짓는 과정과 그 집에서 생활을 시작하는 초기까지 이어서 풀어냈다.

나 또한 수단과 방법에 몰두하느라 진짜 목표를 잃지 않게 되었나 되돌아보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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