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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Oct 03. 2022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환대가 필요한 사회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환대가 필요한 사회


프랑스였던가, 철도 노조의 파업으로 수많은 시민들의 출근이 말도 안 되게 늦어지고 모두가 불편을 겪던 때의 뉴스가 생각이 난다. 시민 인터뷰의 한 장면이었는데, 출근 시간이 두어 시간 늦었다고 말하는 데도 초조하거나 조급한 표정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냐, 불편하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노조의 파업을 지지하기 때문에 자신의 불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철도 노동자들이 좋은 대우를 받으며 근무를 해야 철도를 이용하는 시민들도 양질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안다는 듯이.

비슷한 상황의 한국 지하철을 떠올렸다. 운수 노조의 파업은 아니고,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 시위 현장이다.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는 행위 자체가 '시위'가 되는 장애인들의 하루를 상상하면 그렇게 고달플 수가 없다. 그들도 출근해야 할 직장이 있는 사람들일테고, 그들에게도 이동의 자유가 똑같이 주어져야 하는데 '비장애인 시민'과 '장애인'으로 편가르기하며 갈등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 환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P. 203.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도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를 갖는다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캐나다에 왔을 때 놀랐던 것들 중에 하나가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모습이었다. 장애인 뿐만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 유아차를 끌고 다니는 양육자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이들이 버스에 오를 수 있도록 버스는 인도 쪽으로 살짝 기울어지고 출입구에서 경사로를 내린다. 아무도 눈총을 주지 않고 아무도 불편한 기색이 없다. 약자들을 환대하는 경험은 낯설고 벅찬 것이었다.

이 책에서도 말하듯 환대란,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우해주는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사회에 온전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너는 이곳에 있어도 돼."라는 말을 하는 사회에 온전히 속하는 경험은 생경했다. 어디서 내가 온전히 사람다웠던 적이 있던가.

물론 고국에서도 나는 비장애인-시스젠더 여성으로서 사회에서 완전히 비가시화된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성'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이민의 길을 떠나온 것이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없다고 악을 쓰는 고국을 떠나 내가 있을 곳을 알아서 찾는 여행이었다.


나는 퍽 운이 좋은 편이었다. 겁쟁이처럼 도망칠 수 있도록 금전적인 여유가 있었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익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만큼 말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한국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내 자리가 없다고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곳을 떠나 오롯이 나로서 환대받을 장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

여기서도 나를 환대하지 않는 사람은 있다.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들. 아마 세계 어딜 가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곳의 법과 도덕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하는 사람들은 불이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있다. 그러니까 '사회'가 사람을 환대한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는 정말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었다. 비록 읽기가 쉽진 않았지만, 나도 독서모임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읽지 않았다면 다 읽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꼭 다들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려운 내용이 많았는데, 기억에 남는 부분을 몇 군데 꼽자면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부분과 여성의 낙태를 환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지점이다.


공리주의는 말 그대로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한 원리인데, 가령 예를 들면 조난을 당한 다섯 명의 사람이 "우리 모두 굶어 죽기보다는 한 사람을 희생해 다수가 살아 남는 게 낫지 않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모두를 위해 한 명을 희생'한다면 그 '모두'에는 이미 희생당하는 그 '한 명'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에서 읽을 때 머리가 띵 하고 울렸는데, 막상 독후감을 쓰려고 적어보니 단 몇 문장으로는 설명하기 부족한 것 같다. 그러니까 이 부분이 궁금하면 꼭 책을 읽어보시면 좋겠다.


여성의 낙태 역시 환대의 관점에서 '태아'와 '신생아' 사이에 적절한 선을 그어준다. 현대 사회에서는 탄생이 곧 사회 안으로 들어오는 의례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모체가 출산을 결정하고 아이를 사회로 들여와야 비로소 '사람'으로 자리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태아일 때는 결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데, 태아를 사람으로서 인정하게 되면 임신한 모체는 하나의 수단이 됨으로써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P. 267. 태아에게 장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엄마뿐이기 대문에, 태아를 환대할 권리 역시 엄마에게만 있다. 사회가 엄마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아를 환대하기로 결정하고 엄마에게 임신을 유지하도록 강제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셈이 된다. 즉 엄마의 사람자격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절대적 환대의 원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태아가 아직 사회 바깥에 있으며, 태아를 사회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엄마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 임신-출산 할 일 없는 남자들은 낙태 관련 법에 말 얹지 말라는 말을 어쩜 이렇게 우아하게 하세요?"

임신 중절은 당연히 당사자가 결정해야 하는 부분인데, 이 부분을 환대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 단순히 태아의 생명권이나 모체의 결정권이냐의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가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니까.


이 외에도 죽은 사람이 사회에서 갖는 자리의 의미, 전쟁에 나간 군인들은 국가와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개념,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 문제 등등을 환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어떻게 사회에서 기능할 수 있는지를 훑어본다. 책을 읽는다고 내가 바로 똑똑해지진 않지만, 그래도 읽기 전보다는 사회의 여러 이슈를 또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 소득이었다.

책을 해설해주는 유튜브 영상도 함께 봤는데 덕분에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웠던 것 같다. 영상을 먼저 보고 책을 읽어도 좋고, 책을 읽고 영상을 봐도 좋을 것 같지만, 역시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고 짚고싶다.

내가 봤던 유튜브 영상은 겨울 서점의 영상이다. 링크 하단 참조.


https://youtu.be/3mBYvynEgIs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자리를 내어주도록 투쟁해야하는 아젠다를 구성해야 한다는 마무리가 씁쓸하고 슬펐지만, 그래도 '사회 운동 속에서 절대적 환대는 이미 언제나 실현되어 있다'는 문장의 희망을 마음에 새겨두고 싶다.

어렵지만 유익한 울림이 있는 책이니 꼭 읽어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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