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지 못했던 과거의 나에게, 지금도 숨고만 싶은 나에게.
소위 '미투 운동'에 대해 나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싶었다. 내가 겪은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나서 성희롱, 성추행 한 번 안 당해본 이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나도 일단 현재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여성이기에, 내 생애는 갖가지 성희롱, 추행들로 범벅이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싸워야 했다. 성폭행을 당했지만 내가 '피해자 답지 않아서' 나는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 나만 겪은 특수한 경우는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세상에 이야기를 꺼낸 수많은 '미투'들이 지금 내가 하는 고민과 같은 고민을 수십, 수 백 번도 더 거친 끝에 나온 것일 거다.
나는 누군가를 고발할 생각으로 쓰지 않는다.
나의 지난한 성폭행의 경험을 나열하고 싶지 않다. 나와 개인적으로 친해진 사람들이라면, 나와 대화를 나누는 은연중에 내가 지나가듯 말을 하기도 해서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어, 맞아 나 걔한테 강간당했었잖아." 정말 너무 가볍게. 누가 나의 험담을 해서 힘들어했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보통은 그렇게 듣고 나면 놀라더라.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어! 괜찮니?" 물론 괜찮다. 괜찮으니까 이렇게 가볍게 얘기하는 것이지. 이제 그런 것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언제 강간을 당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다고 강간을 해달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 강간의 피해가 내 인생을 망가뜨릴 정도로 치명적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 강간이, 성폭행 피해 경험이, 단순히 그 정도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은 오랜 기간의 페미니즘 공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피해자이고,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피해 경험으로 나를 깎아내리며 평생을 괴로워하고 살 필요는 없다. 마치 주문처럼 내가 나를 다독이며 살다 보니 이제 겨우 괜찮아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나의 피해 경험을 공론화하여 가해자를 지목하고, 그를 처벌하고자 하는 의사는 없다. 다만 앞으로 나의 남은 생애 동안 가해자와 영영 엮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으면 바란다. 나는 그 사과가 진실될 것이라고 믿지 않고, 사과를 받아들여 용서하고 싶은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처벌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다. 고소를 하고 그의 죄를 입증하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복기하여 증언하는 것. 그것을 수차례 반복해야 하는 것. 피해자는 나인데 나는 그런 고통을 다시 겪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성에 차지 않을 법적인 처벌 수위에 늘어난 한숨뿐일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단 한 가지. 내가 후회하는 것이 있다.
학부생 시절, 같은 과 선배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똑똑하고 현명하고 영리한 나인데, 설마 내가 성폭행을 당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 나는 사실 그를 사랑했던 거야. 사실 좋았잖아? 정말 단 한순간도 그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았던 건 아니잖아. 은근히 바랐던 걸지도 모르잖아?' 속으로 수십 번도 더 자기합리화를 했다. 나는 피해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나의 피해 사실을 숨겼다. 그 이후로도 이어진 그 선배의 성폭행에서 벗어난 것은 순전히 우연에서였던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그로부터의 연락을 모두 무시하고 일상을 살아갔다.
그는 아마 그가 나를 성폭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그건 서로 합의가 있었다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물론 나는 그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에게 좋은 마음이 있었고, 좋은 관계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그와 섹스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었을 거라고 착각했을 뿐이었다. 피해를 직시하기에 너무 두려웠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했을 때 벌어질 모든 일들이 너무 선명하게도 떠올랐기 때문에. "그러게 왜 그의 집까지 따라갔니?" 모든 이들이 나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나를 비난할 사람들의 손가락과 눈빛과 싸늘한 반응들이 두려웠다.
내가 후회하는 것은, 내가 그 당시에 침묵함으로써 그는 영원히 자신의 잘못을 깨우칠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다. 그는 여전히 당시 자신의 범죄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겠지. 그렇기에 그는 같은 죄를 타인에게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공포 중에 하나가 되었다.
내가 그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시간이 흘러 그는 모 방송사의 피디가 되었다던가 기자가 되었다던가 하는 소식을 들었다. 학과 모임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는 나보다 더 어린 여자 후배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아차, 싶었다. 내가 그에게 또 다른 죄를 저지를 기회를 주고 말았던 것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내가 당했던 때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후였다.
나 이외의 다른 피해자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여전히 나는 두렵다. 나의 침묵으로 다른 피해자가 또 있었을까 봐. 앞으로 더 있을까 봐. 지금 나의 이 글로 나에게 비난이 돌아올까 봐. 그가 알아보고 나를 찾아내서 윽박지를까 봐. "너도 좋아서 한 거였잖아!"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 가해자가 누구였는지 지금도 정보를 밝힐 자신이 없다. 다만 나의 이 글을 혹시라도 그가 읽는다면, 혹은 그가 아니더라도 '혹시 내 얘기인가?'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때 당신이 저지른 것은 강간이었고,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다만, 앞으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와 같은 피해자를 또 만들지 않길 바란다.
두려움에 여전히 전전긍긍하는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함께 있겠다고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내 손을 잡아준다면 더더욱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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