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더는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은 이보다 더 적절한 핑계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침 도망갈 수도 없는 공중에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10월, 휴가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아니 사실은 비행기를 타기도 전부터 전자책 단말기에 다운로드해 두었던 <소년이 온다>를 읽기 시작했고 첫 문장부터 눈물을 쏟았다.
P. 13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마음에서, 내 눈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배경인 소설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2016년 맨부커상을 탄 <채식주의자>를 읽고 '한강 작가님의 책은 여러 의미로 버겁다'는 인식을 갖게 되어서인지, <소년이 온다> 역시 버거울 것이라고 지레짐작도 했었다. 게다가 이미 읽은 친구들도 겁을 단단히 주었다.
마음 단디 먹고 읽어야 해.
그렇지만 읽는 내내 마음은 수없이 무너지고 수없이 단단해지고, 또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었다가 은은한 미소가 흘렀다가. 도무지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감정의 댐이 무너져내린 것만 같았다.
책은 10월에 읽었지만, 독후감은 해를 넘기고 1월에 쓰게 되었는데 (순전히 나의 게으름 탓으로), 그 사이 한국에서는 광주가 재현되었다. 아니, 시민들이 광주를 구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P. 110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던 사람들, 자신의 안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강하게 박동하는 양심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시민들이 하나 둘 국회 앞으로 모여 계엄을 막았다. 남태령을 넘는 농민들을 위해서 모진 추위에도 밤새도록 그 곁에서 연대했다. 그렇게 80년 광주 전남도청 앞을 지켰다.
바다 건너에서도 고국의 소식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여러 번 좌절했다가 또 분노도 했다가, 그러나 마침내는 벅차올랐다. 한강 작가님의 노벨 강연의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2024년/2025년의 현재가 1980년의 광주를,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2009년의 용산과 쌍차를, 돕고 있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80년 광주가, 노동자들이, 농민들이, 소수자들이, 2025년 현재를 돕고 있다. 죽은 자들이 산자를 구하고 있다. 시간을 넘어서 서로를 구원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현장에 함께 서 있다. 그러니까 80년 광주에서부터 소년이 이곳에 드디어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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