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문장이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싶다. 문장 하나하나가 주옥같고, 그래서 계속 문장마다 곱씹으면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고, 새로운 문장을 읽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소설을 읽고 싶다.
그런 생각을 꽤 오래 했었는데, <희랍어 시간>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단번에 그 욕망이 채워졌다.
한강의 작품은 이것으로 벌써 네 번째인데, 첫 번째 책이었던 <채식주의자>는 문장에 감탄할 겨를이 없이 내용이 너무 버거웠고, 아무런 정보값 없이 읽었던 <흰>을 읽을 땐 아름다운 문장에 대한 갈급이 없었을 때였는데 (그리고 이제와서는 그 내용도 생각이 안 난다), 그 후에 오랜 시간이 지나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엉엉 우느라 진을 다 뺐기 때문에 <희랍어 시간>을 펼쳤을 땐 그저 덜 힘들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을 때는 문장을 오롯이 만끽하며 읽을 수 있다는 것에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희랍어 시간> 역시 어떤 내용의 소설인지, 무엇이 주제인지 알지 못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읽으면서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말을 잊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유일한 접점 - 희랍어. 이제는 정확한 발음을 아는 이가 없는 고대 그리스어를 통해 의사소통의 한 방향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느껴졌다.
중심 소재가 '언어'라서 이렇게 문장, 문장이 아름다웠던 걸까, 하고 생각했다가, 다시 한강의 다른 작품들을 읽었던 기억을 되짚어보니 한강의 문장은 늘 이렇게 시적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희랍어 시간>에서 조금 더 부각되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10대 시절에 나는 나름 큰 꿈을 갖고 있었는데, 10년 후의 나를 상상하며 10개 국어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 꿈은 절반은 커녕 10분의 1도 채 못 이룬 것 같지만, 그때의 꿈을 다시 꾸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모국어인 한국어를 더 깊이있게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P. 18.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믈다ㅡㄹ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두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숲'이라는 단어 하나만을 들여다보더라도 이렇게 조목조목 짚어가며 형상에 대해, 소리와 발음에 대해, 그리고 뜻과 끌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이처럼 한 단어를 깊게 들여다본 적이, 나는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단 한번도 없었던 것만 같아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민망해지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아름다운 언어의 나열, 그것만이 한강 작품이 가지는 의미는 아니다. 시대정신과 더불어 사랑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의 넓은 마음이 유려한 언어로 표현되었으니, 이러니까 노벨상을 받았던 거구나, 하고 수상의 이유를 어쩐지 납득하게 된다.
P. 42.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그리고 곧바로 나의 신도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 된다.
세상의 슬프고 괴로운 일들, 기쁘고 즐거운 일들, 악과 고통, 그리고 선과 행복이 놓인 곳에는 언제나 신이 존재하고 나는 그 신이 선하고 슬퍼하는 존재라고 믿게 된다. 여기에는 논리적인 입증이 필요하지 않다.
한강이 이 소설을 통해 던지는 화두에 대해 감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비록 자의적이었지만) 언어와 문화가 두동강나버린 지금 나의 세계를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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