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들이여, 축배를 들자

약속이 취소된 것을 축하합니다

by 김삼월

"아.. 어떡하지? 미안하다. 오늘 급한 일이 좀 생겼어. 뭔가 일이 길어질 것 같아서. 진짜 미안해. 우리 오늘 말고 다음에 보면 안 될까. “


약속 시간 세 시간 전, 핸드폰 화면에 뜬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혹시라도 누가 볼까봐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헉 진짜? 어떡하냐. 심각한 일은 아닌 거지? 아니길 바라. 오늘 일 마무리 잘하고 절대 무리하지 마! 다음에도 볼 시간은 충분하잖아."


“전송”


‘일단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사실 조금 즐거웠달까요? 후훟..’


마음속으로 작은 쾌재를 불렀다. 뜻밖의 자유라니! 나 완전 럭키비키잖아?



내향인에게 '약속 취소'란?



INTP(논리적인 사색가)로서, 혼자 있는 시간이 의외로 즐겁다. 흔히 약속이 취소되면 "시간이 붕 떴다"고 슬퍼할 수도 있지만, 나 같은 내향인(INTP)에게는 어림없지. 취소된 약속은 시간이 텅 비는 게 아니라, 꽉 차 있던 시간이 '나만의 것'으로 환원되는.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의 기적.


평소 나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수십 수백 명과 마주한다. 고등학교 윤리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고, 담임으로서 반 아이들의 미묘한 감정선을 살피다 보면, 어느덧 나의 사회적 자아는 로그아웃을 준비한다. 마치 배터리가 방전되는 것처럼!


평일 저녁, 빨간 불이 깜빡거리는 상태로 나가는 약속은, 사실 버거울 때가 자주 있다. 근데 약속이 취소가 됐다고? 마치 해묵은 겨울옷을 꺼내 입었는데, 주머니에서 5만 원짜리 지폐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아주 짜릿하다.


누군가와 함께인 시간도 좋고, 혼자인 시간도 좋다. 온전히 나의 것이 된 시간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고, 어떤 대화 주제를 꺼낼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신경 레이더 off”



고독, 가장 화려한 사치



약속이 취소된 날의 루틴은 정해져 있다. 우선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이 시간엔 딱히 거창한 걸 하지 않는다. 7년 전 썼던 일기장을 펼쳐 읽을 수도 있고, 밀린 유튜브 영상을 볼 수도 있다. 혹은 그냥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망상을 하기도 하며,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기도 한다. 나에게 이 고요함은 가장 비싸고 화려한 사치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선생님'이거나, '친구'거나, '연인'이라는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 하지만 약속이 취소된 방구석 1열에서 나는 그저 '나'다. 아무런 수식어도 필요 없는, 날것 그대로의 나.



타인을 미워해서가 아니다



혹시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내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기운을 주기 위해, 컨디션이 좋은 날에 만나고 싶은 것이다.


방전된 상태로 만나 영혼 없는 리액션을 하느니,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으로 에너지를 꽉 채운 뒤에 만나는 게 서로에게 훨씬 '윤리적'이지 않을까? (직업병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나로서 온전해야 타인에게도 다정할 수 있는 법이니까.


다정함은 건강함에서 나온다는 교훈을 다시 되새기며. 음 일단 눈을 감고 음악이나 들어볼까? 온전히 혼자임에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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