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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사원 Nov 18. 2017

[김 사원 #20] 대리님, 이거 성추행이에요

“다른 팀장님들께도 인사 잘 하고 말이야. 항상 준비된 모습을 보여야 되는 거야”

허 대리는 김 사원에게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태도에 대해 설교했다. 그 시답잖은 내용도 문제였지만, 진짜 문제는 시간과 장소와 방법이었다. 허 대리는 다들 즐겁게 웃고 떠드는 회식 자리에서 김 사원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재치 있는 부분에서는 김 사원의 팔뚝을 툭툭 치며, 진지한 부분에서는 격려한다는 듯 김 사원의 뒤통수와 등을 쓰다듬으며.


직장인들이 매년 필수로 들어야 하는 법정 필수교육이 있다. 그중 하나가 성희롱 예방 교육이다. 업무시간에 한쪽 모니터에 강의를 틀어두고 보는 둥 마는 둥 진도율 채우기에 바빴지만, 매년 똑같은 내용의 강의를 보다 보니 학습 효과가 있었다. 김 사원은 그  강의에서 분명 배웠다. 불쾌한 상황에서 거부 의사를 명확하게 표시하라고. 그래서 말했다.

"대리님, 저 만지지 마세요!"


그 강의에서는 이렇게 거부 의사를 밝히면 상대방이 곧바로 사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허 대리는 김 사원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다.


한 달쯤 지나 다시 회식 자리가 생겼다. 허 대리가 맨 마지막으로 회식 장소에 왔는데 공교롭게도 남은 자리가 김 사원의 옆자리뿐이었다. 김 사원은 허 대리가 소주잔을 집어들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대리님, 저번 회식 때 제 뒤통수랑 등을 쓰다듬으셨던 거 기억하세요~?"


간단한 문장 하나를 지난 회식 이후 며칠 동안 고심해서 만들었다. 언젠가 어떻게든 허 대리에게 말하리라.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 담백하게. 마음속으로 여러 번 연습도 해두었다. 허대리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상상했었다. 가장 피하고 싶은 반응은 ‘아이고 이제 김 사원 가까이 가면 안 되겠네~~ 나중에 또 한소리 들을라~~’ 같은 능글맞은 조롱이었다. 그러면 이런 대사를 쳐야지. 분명하게 하지만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곤란하다는 듯 살짝 웃으며 또박또박) 이렇게 농담으로 삼을 얘기는 아닌 거 같은데요~^^;;"


말 한마디로 허 대리와 틀어질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앞으로 회사 생활이 꼬일 수도 있는데 우습게도 그런 고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무식이 용기였다. 다행히(?) 허 대리는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이후에 김 사원이 없는 자리에서 황당한 심경을 드러낸 모양이지만 그 정도쯤이야.


사과를 받았으니 되었다. 불쾌함이 싹 사라지지는 않지만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허 대리가 걸어온 기싸움이기도 했는데 꽤 능숙하게 방어해낸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어리바리 햇병아리 시절은 졸업했다고!)


며칠 지나 다른 사원에게서 김 사원의 전임자가 겪은 사연을 들었다. 회식자리에서 허 대리가 웃을 때마다 팔뚝을 하도 두들긴 탓에 다음날 팔에 멍이 들어 울상을 지었다는 얘기였다. 김 사원은 문득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예민한 게 아니었구나. 착각한 게 아니었구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남이 뒤통수를 만지는 게 싫었을 뿐인데. 불필요한 격려를 받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더군다나 등을 통해 격려받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을 뿐인데. 존중받지 못했다. 오히려 오해받지 않을까 '프로불편러'로 찍히지 않을까 내심 마음 졸이고 있었다.


김 사원은 마음을 다잡았다. 허 대리는 김 사원의 선호와 의사를 먼저 존중해야 했다고. 자신은 더 당당하게 존중받아야 했다고. 자신과 허 대리, 아니 우리 모두는 존중하는 법을, 존중받는 법을 더 배워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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