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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셜제너럴리스트 Sep 06. 2018

코르셋과 페미니즘

우리만이 아닌 함께를 지향했으면

# 아름다움과 미학

“미학에서 ‘좋은 것’은 곧 종교와 연결된다. 미학적 감각은 종교적 메세지와 내용을 연계해 더 높은 것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데 기여한다. 우리는 이러한 감각을 토대로 종교적 체험을 한다.” (디자인의 가치_프랭크 바그너_p.77)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기준, 그것은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해왔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절대적으로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지는 석양을 머금은 바다, 아이의 미소, 아름다운 처마 곡선의 미, 이런 것들을 보며 우리도 모르게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적 기준은 플라톤의 이데아 처럼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대중에 의해 무언의 합의로 세워진 것일 수도 있다.


# 코르셋

코르셋은 체형을 보정하기 위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보정 속옷을 뜻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 코르셋을 여성만 입은 것이 아닌 남성도 코르셋을 입었다는 점이다.) 코르셋을 입으면 몸에 잘록한 허리 곡선이 생긴다. 이러한 곡선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려한 곡선을 보면 아름답다 느끼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누군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미학적인 기준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탈코르셋이라는 말이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유행하는 가보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생각하고, 여성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것을 코르셋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이 탈코르셋이라는 명사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아름다움의 기준은 절대적, 사회적인 것이지 남성들만이 그 기준을 세운 것이 아니다. 신이 사람을 만들 때 정했거나, 그 기준에 대해 연구하거나,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함께 살아오며 각자의 미를 어필하면서 그 기준이 만들어져 왔다는 것이다. 인간은 더 높은 것에 대한 확신(이것은 프랭크 바그너의 표현이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미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누군가는 사회적 지위로 그것을 나타내고 싶어한다. 그 모든 것은 남성, 여성이 아닌 사람들의 본능으로 부터 나타난 것이지, 어떤 특정 주체들이 만들어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만이 아닌 함께를 지향해야

누구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다. 아름답다라는 것은 절대적이고, 사회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아름다움이 된다.


세상에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수 있을까?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라질 수 있을까? 아름다운 석양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고, 아이의 미소를 보며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사라질 수 있을까? 모두가 각자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주장하고 자랑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자존감, 자신감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다만, 사회적으로 아름다움의 기준이 부당하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네모만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세모도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잘록하고 날씬한 허리만이 아름답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것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다양한 아름다움도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고, 손을 잡아서 그것이 더 대중화된다면 아름다움의 사회적 기준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코르셋이 여성만의 보정속옷이 아니라 남성도 사용했던 보정속옷이듯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고민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진정한 탈코르셋은 합의되고 규정된 무언의 아름다움에 대한 불편함을 가지고 다양한 아름다움이 있음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운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남자들은 다 예비범죄자이고 죽어야 할 대상이라고 ‘재기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기준을 함께 바꿔나가야 할 동료로 생각하며 함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다. 일부 남성들이 여성들을 미적 소모품으로만 보고 평가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그렇게 보지 말아달고, 다양한 아름다움을 함께 인정해줬으면 좋겠다고 함께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폭력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것은 역사적 성과가 있었던 적도 있다. 여성의 참정권도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폭력은 최후의 수단이다. 함께 세상을 바꿔보자고 손을 내미는데 잡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만의 페미니즘을 보며 마음이 불편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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