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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Nov 14. 2021

새 소설집에서 길어 올린 김초엽의 문장들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한겨레출판, 2021)


최애 작가 김초엽의 새 소설집입니다. 2019년에서 2020년 사이에 이런저런 지면에 발표한 단편소설 7편을 실었습니다. 


기계들은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하다. 곧 죽음을 맞이할 그들의 리더에게 동정심을 보여달라는 뜻일까? 물론 나는 셀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오랜 기다림 끝에 미쳐버린 셀이 가엾고, 기계에게 연민을 갖는 내가 당혹스럽다. 그의 고독과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다. - <최후의 라이오니>에서


나는 아직도 가끔 플루이드에 관한 꿈을 꾼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목소리로 존재한다. 나는 제한된 감각을 가졌다. 나는 모그들이 하는 것만큼 풍부하게 그 세계를 감각할 수 없다. 하지만 제한된 감각으로, 애써 세계의 표면을 더듬어보려고 노력한다. 나는 플루이드가 완벽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취할 수도 있었던 어떤 소통의 형태였다고 생각한다. - <마리의 춤>에서


수록작 가운데 <최후의 라이오니>와 <오래된 협약>은 문예지에서 이미 읽은 작품입니다. 첫 소설집보다 문장이 더 단단해졌더군요.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눈이 마주쳤을 때, 로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씩 웃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로라를 사랑하고 있따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제가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로라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걸 깨닫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 <로라>


먼 우주에서 온 작은 존재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떼어 주기로 결정하는 마음이, 이 잠든 행성 벨타라 전체에 깃들어 있었어요. 저는 눈을 감고 그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오래된 협약을, 수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지키고 있는 존재들을. - <오래된 협약>


김초엽의 소설은 연민, 소통, 이해, 공감과 같은 낱말로 수렴되는 미덕을 보여줍니다. 변함없는 따뜻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나는 세 번째 달을 잊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너도.' 내가 이브에게 같은 대답을 했다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때 나는 그냥 웃고 말았던 것 같다. 누구도 개별적으로 기억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금에야 나는 이브에게 같은 답을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 <인지 공간>


이제 언니를 보내줘야 했다. 우리의 세계가 어느 순간 분리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언니의 시공간에는 하루의 스냅 사진들을 매달아놓은 끈이 끝에서 끝까지 걸려 있을 것이다. 그게 언니의 세계였다. 언니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따. 우리가 다시 같은 시간을 점유하며 살아갈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언니는 그 시간을 계속 살아갈 것이다. - <캐빈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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