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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Dec 11. 2021

우리 시대의 로기완들을 기억하며…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


처음에 그는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2010년 12월 7일 화요일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성은 로, 이름은 기완. 스무살, 159쎈티미터의 단신, 47킬로그램의 마른 몸. 무국적자이자 이방인.     


지도를 들고 벨기에 수도 브뤼셀 거리에 서서 로기완의 흔적을 더듬는 나 = 화자 = 주인공. 방송작가는 ‘나’는 취재할 거리를 찾아 시사주간지를 뒤적이다가 한 기사에 시선을 멈춥니다. 벨기에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탈북인의 사연.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니셜 L의 한마디. 그 한마디를 적은 문장은 그 뒤로 줄곧 ‘나’를 불편하게 합니다.     


‘나’는 방송 대본이 아닌, 다른 글을 쓰고 싶어합니다.     


이방인이 되어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 대해 글을 써보면 어떨까 싶어서요방송용 대본이 아니라 이를테면소설 같은 거     


그래서 한국에서 미처 다 매듭짓지 못한 관계들을 그대로 둔 채 도망치듯 브뤼셀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로기완이 난민 지위를 얻도록 도와준 ‘박’을 만납니다. 그에게서 로기완의 일기 한 권과 난민 신청국 심문실에서 작성한 자술서 사본을 받죠. 소설 같은 걸 쓰고 싶은 ‘나’는 그러나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로기완에 대해 무언가를 쓸 자격이 내게 있는 건지 자신할 수가 없다.     


로기완의 행방을 분명히 알면서도 ‘나’는 로와의 만남을 미룬 채 로가 다녔던 그 모든 곳을 하나하나 더듬어 갑니다. 희망이라곤 없는 나라에서 탈출해 생면부지의 나라로 왔지만, 여전히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동양에서 온 이방인. 그의 생각, 그의 번민, 그의 고통, 그가 지샌 불면의 밤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나’는 일기를 읽고 로기완의 자취를 좇습니다.     


연민이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떻게 진보하다가 어떤 방식으로 소멸되는 것인가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그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로기완에게로 향하는 ‘나’의 여정은 바로 그 ‘진짜 연민’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방송 작가로 일하면서 끊임없이 부딪친 문제 역시 ‘진심’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죠. ‘나’는 몸이 아픈 이들이 투병기를 담은 대본이 모두 거짓 같다는 자격지심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깨달음에 도달하죠.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     


소설은 끊임없이 그 ‘연민’을 묻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답을 찾아가죠. 로기완의 흔적을 좇아가던 나는 어느새 전혀 몰랐던 이니셜 L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박’의 오랜 마음의 번민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고, 고국에 있는 두 사람과의 관계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주인공의 변화는 다음 문장에서 적실하게 드러납니다. 브뤼쎌에 온 이후 처음으로나는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2010년 12월 30일 목요일의 일기로 소설은 끝납니다. 이 소설은 로기완의 일기에 대한 ‘나’의 답장입니다.

소설을 읽으며 가슴이 시큰해질 만큼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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