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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Feb 03. 2022

완전하지 않아서 더 애틋한 보물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눌와, 2010)


우리 미술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을 찾아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존재 가치는 오롯합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책상에 앉아 밑줄을 치면서 공부하는 한국미술사가 아니라 소파에 기대어 편안히 독서할 수 있는 한국미술사”라고 이 책을 소개했습니다. 누구나 전공이 있고 전문분야가 있죠. 그래서 한 사람이 통사로서의 미술사를 쓰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마땅한 한국미술사를 찾기 힘든 이유일 겁니다.     


제1권은 선사 시대로부터 발해까지를 다룹니다. 여기까지의 기록 자체가 워낙 빈약해서 기본적으로 미술사를 공부하려면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 중국 쪽 기록인 <삼국지> ‘위서’의 ‘동이전’까지는 읽어야 합니다. 발해에 관해선 조선 후기 학자 유득공이 쓴 <발해고>를 보면 되겠고요. 역시 중국 측 문헌인 <산해경>도 읽어두면 큰 도움이 됩니다. 이 책에도 숱하게 인용되는 기록들입니다.     


옛사람들이 남긴 ‘물건’을 우리는 뭉뚱그려서 ‘미술품’이라고 부릅니다. 물건은 기본적으로 쓰임새(用)와 아름다움(美)이란 두 가지 속성을 품고 있죠. 쓸모도 있었고, 아름답기까지 하다면 그것은 훌륭한 미술품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옛 미술품을 볼 때마다 누가, 왜 저걸 만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곤 합니다. 자주, 깊이 그런 생각에 잠기다 보면 문득 어떤 깨달음에 이르게 되더군요. 물건을 만든 옛사람의 마음을 상상해보는 겁니다.     


이 책에서 제 마음을 붙드는 유물 몇 가지를 만났습니다. 이상하게도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는 것들에 저는 더 끌립니다. 하나는 이 책의 324쪽에 도판이 실린 <소조나한 두상>입니다.     


     

부여 구아리에서 출토됐다는 이 나한 두상은 남아 있는 부분만으론 유물의 온전한 상태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놀라운 것은 저 표정입니다. 대개 그 옛날 장인들의 손에서 탄생한 ‘표정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거나, 또는 웃고 있거나 중 하나입니다. 예술품은 가장 아름다운 상태를 그려내고 빚어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표정은 백제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소하고, 생생합니다.     


고뇌에 찬 얼굴. 깊이 탄식하는 표정일까. 차마 두 눈조차 뜨지 못한 채 입을 벌린 저 얼굴. 저자는 ‘수도자의 처절한 내적 고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불거진 광대뼈의 표현에서는 수도의 힘겨움이 드러나고 입을 벌리다 멈춘 모습에서는 그 고행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내적 고통과 긴장이 서려 있다.” 어떻게 느끼든 그건 감상자의 자유입니다. 다만 이렇게나 생생한 표정을 백제의 장인이 빚어낼 줄 알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은 유물을 언젠가는 꼭 두 눈으로 봐야겠습니다.     



또 하나는 331쪽에 도판이 실린 <불두>입니다. 다른 부분은 어디 갔는지 머리만 남아 전합니다. 이 유물은 경주 황룡사 터에서 발굴됐다고 전해질 뿐 정확한 내력은 아직 모릅니다. ‘신라의 미소’라고 불러도 좋을 이름난 유물이 여럿 알려졌지만, 지금까지 숱한 불상을 보아왔어도 이토록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 입가에 서린 선한 미소라니. 얼굴 형태부터 이목구비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죠. 그래서 상상해 봅니다. 만약 사라진 나머지 부분이 온전히 남아 있다면 정녕 어떤 모습이었을지.     


반대로 347쪽에 도판이 실린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석조반가사유상>은 허리 아래만 남은 석조 반가상입니다. 남아 있는 부분만 봐도 석공의 돌 다루는 솜씨가 가히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죠. 다루기 무척 힘든 화강암에서 저런 곡선을 뽑아낼 줄 알았던 걸 보면 신라 석공의 기량은 당시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럽지 않은 수준이었을 겁니다. 이 귀한 유물을 저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때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절반만 남아서 나머지 절반을 마구 상상하게 만드는 신비의 부처.     

완전하지 않아서, 그래서 더 애틋함을 주는 보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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