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석 May 14. 2022

SF에서 출발해 SF를 넘은 이야기

김초엽 <행성어 서점>(마음산책, 2021)

“죽음을 앞두고 그 애는 말했어. ‘파히라, 내가 당신을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딱 한 번만요.’ 나는 팔을 발려 그 애를 안았어. 끝까지 안고 있었지. 비명을 참고 눈물을 참으며, 피부 표면을 칼로 베어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고통을 견디는 것이 사랑일까 생각하면서.” - 선인장 끌어안기, 30쪽     


“나는 이쪽 세계에서 멜론을 팔고, 저 녀석을 그쪽 세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어느 세계에 있든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고,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지. 그리고 우리는 이 거리에서 종종 마주친단다. 또 다른 나를 만난 적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자주 마주치는 건 우리 둘이었어. 세상의 틈새로 가끔 끼어드는 불가피한 우연 같은 일이지.” - 멜론 장수와 바이올린 연주자, 51쪽     


여기에는 오직 당신과 나 두 사람만 있고, 우리는 둘 다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어요. 그러니 그냥 소리를 내어 대화를 하면 그만이지 않을까요? - 데이지와 이상한 기계, 55~56쪽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한 노인이 조립식 이젤을 세워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망대에 몰려든 사람들은 그림을 흘긋거렸지만, 노인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금 거리를 두고 섰다. 잠시 뒤 어떤 아이가 종이 수첩을 꺼내 들었고, 또 어떤 여자는 개인 단말기에 무언가를 타다가닥 입력하기 시작했다. 다른 행성 여행자들은 여전히 손을 주머니에 찔러 얺은 채였지만, 누구도 기록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여행자들은 다 같이 숨을 죽이고 바람 소리, 연필이 긁히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 포착되지 않는 풍경, 105~106쪽     

그리고 마음에 맴도는 문장들...


김초엽의 소설은 분명 SF에서 출발하지만, 읽다 보면 SF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SF라는 장르의 그릇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SF라는 장르의 문법을 의도적으로 깨려는 시도 또한 하지 않습니다. 거창하고 복잡한 미래 설정이 없을 뿐, 김초엽의 소설이 SF라는 자명한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장르의 문법을 존중하는 작가들을 저는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답사기>에 이은 유홍준의 또 다른 업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