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마을로 유명해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언덕 위에 자리한 이이남스튜디오는 명실상부 이 동네의 랜드마크다. 전남 담양 태생으로 광주에서 대학을 다닌 이이남 작가는 미디어 아티스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에도 서울행을 마다하고 광주에 뿌리내렸다. 과거 제약회사의 사옥으로 쓰였던 양림산 중턱의 낡은 건물을 사들여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해 이이남스튜디오를 열었다. 지역 문화예술계에 이만한 축복이 또 있겠는가.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일 때부터 여러 차례 이곳을 방문했는데, 제법 어엿한 틀을 갖춘 지금도 전시장 안에서는 여전히 새 단장이 한창이다. 1층 전시장 안쪽에 자그마한 한옥을 짓고 있는 것.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아 전모를 보진 못했지만, 방문객들에게 또 하나의 좋은 볼거리가 돼줄 것이다.
창작 스튜디오와 전시장, 카페를 중심으로 계단과 복도까지 이이남 작가의 작품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이곳은 가히 이이남 왕국이라 부를 만하다. 1층 전시장에서는 이이남스튜디오가 새롭게 선보이는 전시 <조우: Here, We Meet>가 열리고 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이남 작가는 동서양의 고전 명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미디어아트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미디어아트라는 예술 장르가 아직 생소했던 2000년, 이이남의 등장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고전 명화를 모니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이이남의 작품은 미디어아트가 생소한 대중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섰다.
이이남 작가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것은 미술사학자이자 비평가 다니엘 아라스의 말이다. “관람객이 5분만이라도 그림 앞에 머물렀으면 합니다.” 평면 회화를 움직이는 작품으로 재해석한 덕분에 관람객들은 이이남 작가의 바람대로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런 ‘소통’의 예술이야말로 이이남의 작품이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다.
전시는 그동안 이이남 작가가 펼쳐온 예술 세계를 몇 가지 주제로 나눠 보여준다. 첫 번째 주제는 ‘5분의 미학, 고전회화를 통한 기운생동(氣韻生動)’. 이이남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은 모두 죽은 것보다 살아 있는 것에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단순한 움직임에 그치지 않고 죽어 있는 내면적 감정이 소생하는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기점에서 고전 회화는 매력적인 소재가 된다. 기운생동(氣韻生動), 마치 살아 있는 듯한 기운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동양의 고전 회화는 생명력을 추구하는 나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사임당 신씨의 <초충도>, 세잔의 산, 모네의 수련 등 한국과 서양의 명화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두 번째 주제에는 ‘뿌리들의 일어섬’이란 부제가 붙었다. 다시 작가의 말이다.
“예술을 통해 대중과 교감하는, 더 좋은 작품 활동을 위해 스스로를 돌아보던 나는 그 창작의 근원을 ‘뿌리’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어렵고 위대한 일이지만, ‘이미 있는 것’ 또는 ‘스스로 가진 것’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창작이라는 것은 새로움에서 탄생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에드워드 호퍼의 저 유명한 밤의 카페도 이이남의 작품에서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이남 작가의 최근 작품에서 모종의 변화가 보인다. 이어지는 세 번째 주제는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다’, 마지막 네 번째 주제는 ‘형상 밖으로 벗어나 존재의 중심에 서다’로 명명됐다.
“나의 세포 DNA, 즉 생명의 정보와 죽음의 정보를 빛(영상)으로 제작해 나라는 뿌리를 찾아간다. 나는 이러한 동양의 산수 정신을 세포사멸(아폽토시스, apoptosis)처럼 삶과 죽음이 이미 내 안에 있으며 우리는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대학에서 조형을 전공하고 조각가로 미술계에 첫발을 디딘 이이남 작가가 자기만의 독보적인 미디어아트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 탁월한 시대 감각과 안목 덕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적 고향인 광주에 이토록 훌륭한 스튜디오를 꾸며 사람들에게 무료로 개방한 것은 그동안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데 대한 보답이다.
이이남스튜디오가 오래도록 지역 문화의 거점으로 사랑받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