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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pr 01. 2024

문화유산 탐방기④ 백제의 고도 공주의 상징 ‘공산성’

해발고도 110m.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가량의 장방형을 이룬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包谷形) 산성으로,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천혜의 요새다. 백제 문주왕 원년(475) 한성에서 웅진으로 이주한 뒤 성왕 16년(538년)에 사비로 옮길 때까지 도성이었다. 공산성은 웅진기 백제의 왕성(王城)으로 사용됐지만,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성왕 4년(526)에 공산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전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입구의 너른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늠름한 석축 위에 문루가 보이고, 좌우로 단단한 성벽이 길게 뻗어나간다. 백제 시대에는 흙을 쌓아 올린 토성(土城)으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 했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을 공격할 때 의자왕이 피란을 왔고, 통일신라 시기인 822년(헌덕왕 14)에는 김헌창이 이곳에서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백제 멸망 이후에도 조선 시대까지 줄곧 행정과 군사 요충지로 사용됐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당시 충주에 있던 충청 감영(監營)이 공주로 옮겨졌는데, 그 때문에 공산성이 대대적으로 개축돼 돌을 쌓아 올린 현재의 석성(石城)으로 단장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당시 인조가 잠시 피신하기도 했으니 이래저래 역사성이 깊은 곳이다.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 12호로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산성 입구에 그 사실을 알리는 석비가 서 있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비석들이 도열하듯 늘어섰다. 공주시와 관련한 인물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의 송덕비가 대부분으로,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 47기를 이곳에 모아 놓았다. 비석 무리를 지나 한 굽이를 돌아 올라가면 성의 입구에 다다르게 된다.     



금서루(錦西樓)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문루는 공산성의 동서남북 네 곳 가운데 서쪽 문루다. 옛 문루는 어느 시기엔가 사라지고, 지금의 문루는 문헌 기록에 근거해 1993년에 원래 자리에서 조금 옮겨 복원했다. 아래에서 바짝 올려다보면 육중한 석축 위로 맵시 있게 뻗은 처마가 멋스럽고, 문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주변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인들이 왜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 알겠다.     


과거에 이곳은 군사와 행정의 요충지였으나 지금은 성을 빙 두른 성곽길 자체가 훌륭한 둘레길이 돼준다. 둘레 2,660m로 한 바퀴를 돌면 정확히 제자리에 이른다. 금서루에서 안쪽을 내려다보면 멀리 금강까지 제법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이곳에 여러 왕궁과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을 거로 추정된다.     


성곽길을 따라 걸어도 좋고, 건물지 사이를 걸어도 좋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이 보이는 곳에 이르면 문루가 또 하나 서 있다. 공북루(拱北樓)는 공산성의 북쪽 문루다. 문루 자체가 시원시원해서 보는 맛이 각별하고, 문루에 올라 도도히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는 맛 또한 가히 일품이다.     



지형지물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일정한 위엄과 기품을 간직한 곳.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하늘을 찌를 듯 우람하게 솟은 산을 볼 수 없다. 완만한 능선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또 흘러가며 사람 사는 땅과 함께 호흡한다. 그것이 바로 공주의 매력이요, 공산성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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