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고학의 대표적인 흑역사를 하나만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무령왕릉 발굴을 꼽을 것이다. 전국에서 기자들과 구경꾼들이 떼로 몰려든 상황에 장마철까지 겹쳐 유물을 허겁지겁 수습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조사는 영영 물 건너가고 말았다. 심지어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자, 어떤 유물은 서울로 불려갔다. 문화적 역량이 성숙하지 못한 국가와 지도자의 무지(無知)를 드러낸 참담하고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웅진 도읍기 백제의 왕과 왕족의 무덤 가운데 지금까지 복원된 것은 7기이고, 이것들을 묶어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명명했다. 무령왕릉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주인이 밝혀진 유일한 무덤이다. 그러니 그 역사적 중요성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무려 108종 4천6백여 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도 ‘기적’이었다.
왕릉은 답사지로서의 큰 매력은 없다. 작은 언덕 모양으로 솟은 봉분을 밖에서나 볼 수 있을 뿐, 무덤 안을 들여다볼 방법이 없으니 눈에 담을 것이 많지 않다. 다만 예로부터 왕의 무덤을 쓴 자리는 명당일 것이 틀림없으므로, 왕릉이 조성된 곳의 지세와 주변 풍광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탐방객들에게 호젓한 산책길을 제공한다. 아직도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어, 주변 환경이 조금은 어수선하다. 조용한 숲길을 따라 걷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다. 공주를 대표하는 시인 나태주는 일찍이 <무령왕릉>이란 시를 썼다.
누가 있어 백제를 사라졌다 그러는가
한반도의 한 가슴 눈부셨던 한 나라
고요와 미소의 나라 여기 와서 보시라
공주라 무령왕릉 천오백년 잠을 깨어
하늘 아래 연꽃으로 둥그스름 피었으니
임금님 무령 임금님 오늘에도 뵈옵네
불꽃 모자 비단옷 구슬소리 울리며
세상을 굽어보고 백성들 보살피러
오시네 저기 오시네 우리 임금 오시네
보소서 보옵소서 우리들 하루하루
소금 바다 괴론 인생 굽어살펴 주시옵고
그날의 화평과 사랑 오늘에도 주옵소서
무령왕릉의 ‘진짜’를 보려면 반드시 국립공주박물관에 가야 한다. 무령왕릉은 이 박물관의 존재 이유와도 같다. 박물관의 시작은 1946년 4월 1일 문을 연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이다. 이후 1973년 박물관 건물을 새로 지어 올렸고, 1975년 이름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바꿨다. 현재의 박물관은 2004년 새로 지어 옮긴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가깝다. 왕릉과 박물관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국립공주박물관에 가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공간이 바로 상설전시실인 ‘웅진백제실’이다. 오롯이 무령왕릉에 할애된 공간이다. 무령왕릉 발굴 자체가 우리 고고학의 역사에서 놀랍고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만큼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국보가 수두룩하다.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는 어린이용 이야기책에도 등장할 만큼 인기 만점의 존재다. 중국 후한 대부터 나타나는 진묘수는 뿔과 날개가 달렸고, 무덤 입구를 지키면서 망자의 영혼을 신선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몸통은 돌을 깎아 만들었고, 머리에 달린 뿔은 철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는 새끼돼지와 비슷한 모습으로 크게 벌린 입 하며 앙증맞은 꼬리까지 사랑스러운 존재다.
무령왕릉이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결정적인 유물이 바로 묘지석이다. 묘지(墓誌)란 망자의 생애를 적은 글을 가리킨다. 무령왕의 묘지석은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께서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 모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로 시작한다. 왕비의 묘지석 첫머리는 “병오년(526년) 11월 백제국왕태비가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 서쪽의 땅에서 (빈전을 설치하여) 삼년상을 지내고 기유년(529년) 2월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지내며 기록하기를 다음과 같이 한다.”이다. 이 짧은 기록에 담긴 정보의 가치만 해도 실로 어마어마하다.
제왕의 지위와 품위에 걸맞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금제 유물들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백제 공예의 정수를 보여준다. 어떤 장신구는 오늘날의 미감으로 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천오백 년 세월이 믿기 힘들 만큼 놀랍다.
하지만 전시실에서 가장 인상적인 유물은 바로 관(棺)이다. 나무로 짠 왕과 왕비의 관은 놀랍게도 일본에서 자생하는 나무인 금송(金松)으로 만들었다. 당시 백제가 왜(倭)와 교류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그 오랜 세월에도 이 정도로 외형이 남아 있다는 사실마저 놀라움을 준다. 이 전시실만 꼼꼼하게 돌아봐도 백제가 어떤 나라였는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박물관 외부 공간에는 갖가지 석조물을 모아 놓았다. 이 가운데 공주의 사찰 대통사(大通寺)에서 쓰던 큰 물그릇이었던 석조(石槽) 두 점은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일찍이 지정돼 귀하게 관리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