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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pr 26. 2024

향기로운 글씨와 아름다운 그림의 만남

석기자미술관㊸ 남정 최정균 탄생 100주년 기념전: 싹


남정(南丁) 최정균(崔正均, 1924~2001). 우리에게 낯선 이분은 한국 근현대 서예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서화가다. 일세를 풍미한 서예가 소전 손재형의 문하에서 글씨를, 한국화단의 거목 월전 장우성에게 그림을 배웠다. 글씨와 문인화에서 모두 일가를 이뤄 당대 꽤 명성이 높았다. KBS <TV미술관>이 1989년 11월 19일 ‘문인화가 남정 최정균’ 편을 방송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0대에 원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 인연으로 원광대학교를 나와 원광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육자로서 최정균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1988년 세계 최초로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에 서예학과를 개설한 것이다. 그때까지의 도제식 수업 방식에서 벗어나 대학에서 이론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가르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계에 서예 작가를 배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최정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마련한 이번 전시는 부인 배수임 여사가 2006년 예술의전당에 기증한 작품 39건 43점을 포함해 유족 등이 소장한 최정균의 작품 15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최정균 <병매도(甁梅圖)>, 1981, 종이에 채색, 47.5×66.5cm, 예술의전당 소장

     


서화가로서 최정균은 매화와 연꽃에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 글씨와 어우러진 그림에서 단아한 풍격이 느껴진다. 전시장 초입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작품 가운데 최정균 문인화의 멋과 맛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1981년 작 <병매도(甁梅圖)>를 꼽을 수 있다. 어눌한 모양이 수더분하기 그지없는 백자 항아리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붉은 매화가 자아내는 운치가 상당하고, 그림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써 내려간 글씨가 그림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최정균 <수석도(壽石圖)>, 1984, 종이에 채색, 40.0×50.0cm, 개인 소장

 


개인적으로 마음에 쏙 든 작품이다. 서예만큼이나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어진 수석 취미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 작은 그림이 풍기는 아취가 그윽하다. 돌의 초상화 같기도 하다. 상단에 화가가 붙인 제목은 여석동수(與石同壽), 돌과 함께 오래 늙어가리라는 말이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내 이름자가 석(石)이다.  

   

최정균 <홍매도(紅梅圖)>, 1988, 종이에 채색, 126.5×426.0cm, 예술의전당 소장

   

  

대작으로는 1988년 작 <홍매도(紅梅圖)> 10폭 병풍이 있다. 큰 작품에서 보이는 화가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작품이 없는 것은 아쉽지만, 이 작품 하나로도 화가가 생전에 매화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제목은 매경한고발청향(梅經寒苦發淸香). 매화와 관련해 수없이 인용되는 대표적인 구절로, 매화는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 맑은 향기를 뿜어낸다는 뜻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바탕에 문살무늬가 보인다. 병풍을 짠 나무틀이 종이와 맞닿은 부분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색이 짙어진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장황을 잘못한 데다 보관도 잘못해서 그림이 망가진 것이지만, 화가가 일부러 그려 넣은 것처럼 그 흔적 자체가 그윽한 멋을 자아내니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더욱이 조명을 일부러 어둡게 해놓은 전시장에서 보면 그렇게 분위기가 좋을 수 없다. 그 맛을 느끼려면 모름지기 그림 앞에 서야 하는 법이다.     


()는 원래 한자가 기본이 되었고그 한자는 처음 상형에서 발생하여 전()().().()로 발전해오는 동안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으나 그 회화적 요소는 상존(尙存)해왔으므로 서()와 화()는 동원(同源동질(同質)인 것이다.     


글씨와 그림의 뿌리와 바탕이 같다는 뜻이다.      


글씨 예술, 즉 서예(書藝)가 대중에게 깊이 파고들지 못한 데는 한자 해독의 어려움이라는 치명적인 걸림돌이 존재한다.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한자를 거의 안 쓰는 데다가 학교에서도 한자를 안 가르친다. 일상에서 쓰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멀어지기 마련. 내용이 뭔지 모르는 서예 작품에서 감흥을 얻기란 힘들다. 그래서 서예 전시는 인기가 없다. 서예 작품의 가격 또한 형편없다.     


이제 최정균의 글씨를 보자.     


최정균 <어부사(漁父辭)>, 1961, 종이에 먹, 119.5×253.2cm, 예술의전당 소장

     


이 여섯 폭 병풍은 만인의 추앙을 받은 중국 초나라의 대시인 굴원(屈原)이 정계에서 쫓겨나 강남에 머물며 지은 <어부사(漁父辭)>를 쓴 것이다. 내용은 차치하고 글씨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글씨 안에 사람의 모습이 있다. 맨 왼쪽 것은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무릎을 꿇고 앉은 여인의 모습을, 맨 오른쪽 것도 상상하기에 따라 어떤 행동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우연히 그렇게 보인 건가 싶어 최정균의 다른 글씨도 유심히 봤더니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글자가 꽤나 많이 발견된다.     


최정균 <방원합도(方圓合道)>, 1985, 종이에 먹, 34.5×125.5cm, 윤학상 소장

    

풀이하면 모난 것과 원만한 것, 또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잘 조화해야만 도에 부합한다는 뜻이다. 네모를 뜻하는 방(方)과 동그라미를 뜻하는 원(圓)의 모양을 보라. 오른쪽의 방(方)이 옆에 있는 원(圓)을 겨냥하는 듯 자세를 취했고, 원(圓)은 방어하려는 듯 뒤로 슬쩍 뺀다. 상반된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말뜻을 글자의 형태에 담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 유심히 관찰했다.     



최정균 <이백 시 ‘장진주(將進酒)’>, 종이에 먹, 127.5×33.0(8)cm, 미술관 솔 소장

    

중국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 이백(李白, 701~762)의 저 유명한 술 권하는 시 <장진주(將進酒)를 쓴 것이다. 8폭 병풍의 오른쪽 4폭에 담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君不見 그대 모르는가,

黃河之水天上來 황하의 강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回 바다로 쏟아져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음을.

君不見 그대 모르는가,

高堂明鏡悲白髮 고대광실 환한 거울 앞에서 흰 머리 슬퍼함을

朝如靑絲暮成雪 아침에 푸른 실 같더니 저녁엔 눈처럼 세었다고.

人生得意須盡歡 모름지기 인생은 마음껏 즐길지니

莫使金樽空對月 금 술통 빈 채로 달을 거저 대하지 말라.

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내 재주 내었을 땐 필경 쓰일 데 있으리니

千金散盡還復來 천금을 탕진해도 언젠가는 돌아올 터

烹羊宰牛且爲樂 양 삶고 소 잡아서 즐겨나 보자.

會須一飮三百杯 한번 마셨다면 삼백 잔은 마실지라.     


여기서 맨 오른쪽 첫 구절을 보면 재미있는 글자가 있다.     



중국의 큰 강 황하(黃河)를 가리키는 하(河)를 잘 보면, 강태공이 잡은 낚싯대에서 아래로 줄이 늘어 내린 모양새다. 왼쪽에서 다섯 번째 폭 맨 아래 보이는 장(長)도 묘하다. 최정균의 글씨에는 사람 닮은 글자가 꽤 많다. 혹 잘못 짚은 것인가 싶어 다른 서예가들의 글씨를 자세히 들여다봐도 사람 모양의 글자는 최정균의 글씨에서만 발견된다.     


서예에 문외한이니 내 나름대로 즐거움을 얻는 방법을 찾아본 것인데,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최정균의 글씨에서만 보이는 저 사람의 모습은 신기하다. 사람의 형상이 글씨 안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거로 보아, 작가가 뚜렷한 조형적 의지를 갖고 사람 닮은 글씨를 썼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인간을 새겨넣은 글씨. 인간적인 글씨. 그것이야말로 최정균 글씨의 독보적인 특징이자, 최정균이란 서예가의 됨됨이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렇게 요모조모 관찰하다 보니 서예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최정균 추모비 탁본>, 2003, 종이에 탁본, 최용구 소장

     

이번 전시에서는 최정균의 그림과 글씨는 물론 최정균에게 영향을 준 사승(師承)의 작품, 최정균과 교유한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최정균이 뿌린 씨앗이 ‘싹’으로 자라 미술계, 서예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원광대학교 서예과 출신 작가들의 작품까지 최정균이라는 서화가의 예술적 여정을 수놓은 결정적 순간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 좋은 전시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유감스러울 정도로 볼거리며 짜임새며 매우 훌륭하다. 서예를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끼는 이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김종건 <싹 24001>, 2024, 캔버스에 혼합재료, 120.0×120.0cm, 작가 소장

    

전시 정보

제목남정 최정균 탄생 100주년 기념전

기간: 2024년 5월 5()까지

장소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문의: 1688-1352, www.sa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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