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㊼ 호암미술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이 전시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불교미술에 ‘여성’의 존재가 어떻게 표현됐는지, 봉건 시대 여성이 불교미술 제작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들여다보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1층 전시장에서는 ‘다시 나타나는 여성’을 주제로 불화와 불상을 통해 각 시대와 사회가 여성을 재현한 방식을 조명하고, 이를 통해 여성에게 지워진 의무와 기대된 역할을 돌아본다.
1층 전시장에서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것은 팔상도(八相圖)다. 팔상도란 석가모니의 일생에서 결정적인 여덟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현재 전하는 팔상도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제작됐다. 출품작은 순천 송광사 영산전(靈山殿)에 봉안할 목적으로 1725년(영조 1)에 화승(畵僧) 18명이 참여해 완성한 작품이다. 송광사성보박물관 소장품으로 일괄 보물이다.
전시장에 걸린 팔상도 넉 점 가운데 <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이다. 기독교 성화(聖畫)에서 예수의 생애 마지막이 부활과 승천이듯, 석가모니의 생애 마지막 또한 다비(茶毘)를 통해 열반(涅槃)에 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야기는 오른쪽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전개된다. 화면 왼쪽 가운데 석가모니를 낳고 곧 숨을 거둔 어머니 마야부인의 모습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황토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을 많이 사용했다. 불교회화의 채색 전통을 잘 보여주는 그림으로 주목된다.
감상의 대상으로서 전통 회화에는 슬픔을 묘사한 장면이 극히 드물다. 조선 후기 풍속화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표정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불교회화의 전통에서는 일찍이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화폭에 묘사했으니, 15세기라는 이른 시기에 그려진 이 작품에 그런 장면이 보여 흥미롭다.
독일 쾰른동아시아미술관 소장품으로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의 화면 오른쪽 전각 안에 보이는 빈 의자 아래서 엎드려 우는 여인은 석가모니의 태자 시절 부인이었던 구이(俱夷)다. 왼쪽에 앉은 시녀들도 옷깃으로 입을 가리며 울고 있다. 태자비는 화면 아래 오른쪽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주인 없이 돌아온 백마를 붙들고 혼자 슬피 우는 여인이다. 태자의 출가를 슬퍼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됐다.
전시장에 걸린 <석가탄생도> 두 점 가운데 15세기 조선에서 제작한 일본 사찰 혼가쿠지(本岳寺) 소장품이 있는데, 위 그림은 그 원본을 모사하다가 만 미완성작이다. 화면 상단에 적힌 자초지종은 이렇다. 에도시대 화가 오쿠무라 교쿠란(奧村玉蘭, 1761~1828)이 <석가탄생도>를 보고 깊이 감명받아 그림을 모사하게 해달라고 사찰에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거듭 머리를 조아려 끝내 허락을 받아내 성심을 다해 그림을 모사하다가 그만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후 화가의 아들이 화공에게 의뢰해 그림을 마저 완성하는 것이 어떨까 했으나, 화면 상단에 글씨를 쓴 일본의 선승은 미완성 그대로 후세에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답했다 한다. 그 덕분에 미완성작이 주는 특별함이 더 돋보이는 그림으로 남았다. 하여 두 작품을 비교해서 보면 좋다. 화면 정중앙에 곱게 단장하고 앉은 사람이 바로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의 <시왕도 十王圖>다. <시왕도>는 명부 세계의 심판관인 열 명의 왕과 그들이 다스리는 각각의 지옥을 한 폭에 담은 그림이다.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은 여성이 목에 형구를 쓴 채 옥졸에게 끌려나가고, 그 옆에서 벌거벗은 아기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모습이다. 생생한 표정이며 자세에서 심판받는 자의 안타까움이 여실하다. 살아서 죄를 지으면 죽어서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불자들에게 이보다 더 확실한 가르침이 없었을 게다.
여기 끔찍한 장면을 담은 그림이 있다. 출가한 사람이 자신과 타인의 육체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해 육체의 부정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부정관(不淨觀)이라 한다. 이 가운데 시신이 부패해 백골이 되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나눠 관찰함으로써 모든 것이 덧없다는 깨달음을 새기는 수행법을 구상관(九相觀)이라 한다. 여기서 나온 그림이 바로 구상도(九相圖)다. 일본 회화에만 보이는 전통이다.
화면 오른쪽 아래 고운 치마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있다. 그런데 바로 왼쪽에 발을 드리운 방 안에 시신으로 누워 있다. 여기서 화면 왼쪽 위로 들판에 헐벗은 채 누운 시신으로부터 오른쪽 위 방향으로 조금씩 썩어가는 시신을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묘사해 놓았다.
결정적인 것은 까마귀가 눈알을 파먹고, 들개가 살점을 물어뜯는 끔찍한 장면이다. 다 뜯기고 나면 남는 것은 뼈일 뿐. 화면 왼쪽 위에 빼꼼 고개를 내민 것은 망자를 기리는 탑이다. 조선 회화의 전통에는 죽음의 묘사가 거의 없다. 시신을 보여주는 그림 자체가 대단히 희귀하다. 그에 반해 일본은 죽음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묘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그림이 그 생생한 증거다.
이번 전시의 대표 유물이라 할 백제 보살상이다. 1907년 충남 부여의 어느 절터에서 발견됐다고 전하는 이 보살상은 이후 오랜 세월 자취를 감췄다가 이번 전시회를 통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는 귀한 보물이다.
표정, 자세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는 백제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최고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백제의 미소’하면 누구나 서산마애삼존불을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 자리를 접수해도 전혀 모자람 없는 잔잔하고 은은한 미소의 아름다움이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맵시 있는 뒷모습 또한 얼마나 매력 있는지 모른다.
보살상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얼굴을 들여다보게 된다. 같은 보살상이라 해도 만든 이에 따라, 시대에 따라, 자세에 따라 같은 관음보살이라 해도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읽어내는 것은 오롯이 관람자의 몫. 국립중앙박물관과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품을 비교해가며 보는 것도 흥미롭다.
수월관음도를 비롯해 국내외의 다양한 기관에 소장된 귀한 그림을 지나 1층 전시장의 막바지에 이르면 백자 보살상을 만나게 된다. 백자로 보살상을 빚는 전통은 중국의 것인데, 이번 전시에서 독특한 두 보살상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 백자 좌상의 주인공은 여성형 관음보살인 송자관음(送子觀音)이다. 인도나 중앙아시아에는 없는 중국 불교 고유의 도상으로, 보관과 비녀를 결합한 머리 단장이 특색이다. 가슴에는 목걸이가 드리워졌다. 보살 무릎에 앉은 아이는 한 손에 바나나, 다른 손에 금괴를 들었다. 이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다음 장면을 보자.
청나라 때 만들어진 성모마리아상이다. 일찍이 가톨릭 신앙이 전해진 청나라에서는 이처럼 성모 마리아상을 백자로 만들어 유럽에 수출했다고 한다. 불교미술품 사이에서 이런 특별한 유물을 만나는 흥미로움은 덤이다. 두 작품 모두 영국박물관 소장품이어서 이 전시가 아니면 볼 기회가 없을 것 같다.
1층 전시장을 나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향한다. 2층에서 미술관 창밖으로 보이는 경관이 무척 빼어나다. 차경(借景)이라는 것이 딴 데 있겠는가. 파란 하늘 아래 점점 빛을 더해가는 산과 숲과 나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은 호수까지 무르익은 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른 뒤 2층 전시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2층 전시장은 불교 교단과 사회의 제약 속에서도 깨달음을 열망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불상과 사경 발원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자리다.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아들이는 것은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물>이다. 복장물이란 불상을 조성할 때 그 안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 함께 넣는 물품을 뜻한다. 대표적인 것이 불상 조성을 위해 시주한 이들의 바람을 적은 발원문이다.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조성에는 무려 1천 명이 넘게 참여했다고 하니 당시로써 대대적인 불사였을 것이다. 발원문 뒤에는 1,078명에 이르는 발원자의 이름과 소원이 적혀 있고, 특별히 발원 내용을 적어 꿰맨 고급 비단 조각도 더러 보인다. 이 가운데 붉은 비단 조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상자를 경함(經函)이라 한다. 경전이 소중한 만큼 보관함도 가장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고려 장인들은 조개껍데기를 얇게 잘라 붙이는 나전(螺鈿) 기법으로 경함을 제작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나전 경함은 세밀가귀(細密可貴)라 하여 정교한 예술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려의 대표적인 예술로 남기에 이른다.
영국박물관 소장의 <나전 국당초문 경함>도 그런 고려 나전의 예술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명품 중의 명품이다.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유교를 사회 주도 이념으로 한 조선 왕조가 선 이후에는 불교의 영향력이 크게 쇠락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아무런 거부감없이 믿어온 신앙 체계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을 터. 조선 왕실도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궁궐 안에 불당을 설치해 왕실의 안녕과 선왕선후의 명복을 빌었다. 이를 내불당(內佛堂)이라 했다.
16세기에 제작된 이 궁궐도 형식의 그림은 그런 전통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그림이 크지 않아 육안으로 식별하기는 쉽지 않지만, 화면 위의 왼쪽 전각 안을 자세히 보면 삼존불상이 안치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찰을 찾아 궐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았던 왕실 여성들에게 이곳은 말 그대로 답답하고 무거운 궁궐 안에서 잠시나마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기도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 기증 덕에 만날 수 있게 된 귀한 그림이다.
2층 전시장의 마지막 공간에서는 자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자수로 제작한 부처의 형상을 수불(繡佛)이라 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해인 1910년에 제작된 이 관음보살도는 형형색색 실로 한 땀 한 땀 일일이 바느질해서 완성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화려하고 정교하다. 이런 예술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당연히 신앙의 힘이다. 조선 왕조의 숨이 다해가던 시기에 발원자는 자수 관음보살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전시는 여기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호암미술관의 진짜 보물은 미술관 밖에 있기 때문이다. 희원(熙園)이라 불리는 호암미술관 야외 정원은 우리 전통정원을 대표하는 명소로 꼽힌다. 네모 모양의 방형(方形) 연못을 중심으로 온갖 나무와 꽃이 어우러진 이 아름다운 공간을 거닐다 보면 도시에서 한껏 찌들었던 마음의 때를 벗어버리는 상쾌함과 청량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정원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전시 관람료가 전혀 아깝지 않다.
사실 불교미술은 어렵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 해도 도상의 의미를 온전히 알지 못하면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대중적으로 소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 전시를 연 의미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전시 해설자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는 것이 필수다. 다시 말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인데, 공부하는 전시는 대중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사전에 전시도록을 충분히 읽고 갔는데도 전시 취지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국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아니 앞으로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를 귀한 불교미술 명품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 영국박물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보스턴미술관을 비롯해 미국, 유럽, 일본의 유명 박물관 소장품이 대거 출품됐다. 더불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 줄 몰랐던 중요한 유물도 여럿 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희 회장 기증품이 상당수 눈에 띈다. 그 기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전시회에서 실감하게 되니 참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