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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Jan 23. 2020

조선시대 그림에는 왜 '집돼지'가 없을까?

정혜경 《고기의 인문학》(따비, 2019)

조선시대 그림을 공부하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동물 그림이 그리도 많은데, 어째서 집돼지는 안 보일까. 믿기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조선시대에 돼지 그림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돼지 그림 자체가 극히 드뭅니다. 게다가 그 돼지들이란 게 모두 야생 멧돼지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혹시 집돼지를 그린 조선시대 그림이 있다면 제게 꼭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돼지를 가축으로 길들인 역사는 굉장히 오래됐습니다. 당연히 돼지고기를 오래 전부터 먹어왔을 테고요. 그럼에도 돼지를 그리지 않았다는 것,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게 뭘까. 제 나름대로 추측을 해봤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가장 가깝게 지낸 동물로 크게 네 종류가 있지요. 개, 소, 닭, 그리고 돼지입니다. 넷의 공통점은 인간에게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란 겁니다.     



그럼 돼지에게만 없는 건 뭘까. 개와 소, 닭은 각기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장기를 하나씩 갖고 있습니다. 개는 짖어서 집을 지켜주고, 소는 힘들여 밭을 갈아주고, 닭은 울어서 새날을 알려주죠. 하지만 돼지에겐 아무 재주가 없습니다. 먹고 싸고 자는 게 전부죠. 그래서 옛 화가들이 유독 그렇게 돼지에게만은 인색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 겁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읽은 식품영양학자 정혜경의 책 《고기의 인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돼지고기를 먹어왔지만 조선시대까지도 돼지는 그다지 선호되는 고기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삼겹살에 대한 한국인의 광적인 사랑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죠.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더군요. 본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돼지는 소처럼 자연에서 나는 풀 등을 먹일 수 없고 사람이 먹고 난 부산물이 있어야만 기를 수 있다. 지금 돼지 축사에서 잔반을 모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 터에 백성들이 돼지를, 그것도 살이 찌도록 먹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저명한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도 똑같은 점을 중요하게 지적했다고 소개합니다.     


반추동물들은 인간이 먹어야 할 곡물을 나눠 먹지 않고, 인간이 먹기에 부적절한 풀이나 짚, 건초, 잎사귀 등을 먹고 살면서 고기와 젖을 제공했다. 반면 인간과 비슷한 먹이를 두고 경쟁 관계에 있는 돼지고기는 기피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정이 곧 돼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인 것은 물론 아니겠죠. 하지만 돼지를 선호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조선시대에 돼지 사육이 그다지 활발하지는 않았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눈에 잘 안 띄는 동물을 조선의 화가들이 일부러 찾아다니며 그리지는 않았겠죠. 이래저래 돼지는 적어도 조선시대까지는 인간과 그다지 친한 동물은 아니었던 겁니다.     


기산 김준근(金俊根, ?~?)이란 화가의 존재는 그래서 소중합니다. 김준근은 조선 말기에 활동한 화가입니다. 하지만 그 생애는 베일에 싸여 있죠. 언제나 태어나고 언제 돌아갔는지조차 모릅니다. 조선 말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대표적인 개항장이었던 원산을 근거지로 그림을 그려 팔았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죠.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는데, 특이하게도 김준근의 그림은 전 세계에서 무려 1,800점이 넘게 확인됐습니다.     


외국인들의 방문이 활발해지던 시기에 김준근은 조선의 풍속을 그려 팔았습니다. 그렇게 판매한 그림들이 훗날 세계 각국의 박물관에 소장되면서 이 물음표 같은 화가의 이름은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됐지요. 그래서 김준근의 그림을 ‘수출 풍속화’라 부르고, 김준근을 ‘미술 한류의 원조’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김준근 <넉넉한 객주>(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소장)


저는 이 책에서 집돼지다운 집돼지를 그린 김준근의 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된 <넉넉한 객주>라는 그림인데요. 어미 돼지와 새끼 두 마리가 마당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죠. 집돼지가 틀림없습니다. 이 책에는 집돼지를 그린 김준근의 그림 두 점을 더 소개해 놓았습니다.     


(좌) <동저상>(네덜란드 라이덴민족학박물관 소장)  (우)<시장에 돼지를 끌고 가는 모습>(캐나다 왕립온타리오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블로그>


 왼쪽 그림의 제목은 화면 오른쪽 위에 보이는 동저상(冬猪商)입니다. 얼린 돼지고기를 파는 상인이란 뜻이겠죠. 작은 돼지 세 마리가 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크기나 모양으로 보면 영락없는 집돼지입니다. 오른쪽 그림을 보면 한 노파가 돼지를 줄에 묶어서 끌고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역시 집돼지입니다. 멧돼지라면 힘없는 할머니가 저렇게 혼자서 끌고 갈 수 없겠죠.     


이 책은 고기의 역사에서 출발해 한국인이 먹어온 고기의 이모저모, 다양한 고기 요리, 고기 맛과 건강의 관계, 고기 문화의 미래까지 두루두루 다룬 개론서입니다. 저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1부의 ‘그림과 문학 속 고기 풍경’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답니다. 참고로 육류보다는 채식이 선호되는 요즘 사회 분위기를 저자도 꽤 신경 쓰고 있더군요. 이 책에 앞서 《채소의 인문학》을 먼저 낸 걸 봐도 그렇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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