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61) OCI미술관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
윤상(尹相). 미술품 수집가. 자기 이름을 건 《제1회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을 1956년 7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서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개최. 화가 49명이 그림 64점 출품. 고희동, 김은호, 이상범, 변관식, 이종우, 도상봉, 이응노, 이마동, 김인승, 김기창, 박득순, 박영선, 김환기, 김응진, 김원, 이유태, 김영기, 이봉상, 이중섭, 신홍휴, 윤중식, 장욱진, 송혜수, 유영국, 박수근, 박성환, 박래현, 천경자, 김병기, 박고석, 이종무, 이준, 한묵, 류경채, 이세득, 변종하, 김영주, 류영필, 장이석, 황염수, 임직순, 최영림, 황유엽, 정규, 최덕휴, 문학진, 김종하, 변영원, 손응성.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전시 리플릿의 소개 글에서 당시 대한미술협회 위원장 도상봉은 이렇게 썼다. “화단의 원로 선배를 위시하여 중견, 신진에 이르기까지 총망라된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행사로 중대한 의의를 가져온다.” 윤상은 전시가 끝난 뒤 신문에 기고한 「수집가의 사명」이란 글에서 3, 4년간 수집한 현대화가 작품 60여 점 덕에 ‘수집가’라는 이름이 생겼다며, 이 전시가 연구자들에게 참고가 되고, 화가들에게 도움이 되길 희망했다. 아울러 첫 번째 전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2회 때는 더욱 성대한 전시회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윤상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전시회는 단 한 번으로 끝나고 말았다.
확인된 행적이 거의 없는 ‘미지의 수집가’ 윤상이 세상에 남긴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제1회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의 방명록이다. 화가들뿐만 아니라 당시 전시를 찾은 공예가, 서예가, 배우, 문학가, 음악가, 영화감독, 문화예술인, 국어학자, 기업가 등 모두 104명이 흔적을 남겼다. 방명록에 그림을 그려준 화가는 27명. 고희동, 김은호, 이상범, 변관식, 도상봉, 이응노, 김기창, 박득순, 김응진, 김원, 이유태, 김영기, 이봉상, 윤중식, 박수근, 박성환, 박래현, 천경자, 이준, 한묵, 변종하, 장이석, 황염수, 임직순, 최덕휴, 변영원, 손응성이다.
올해로 개관 15주년을 맞은 OCI미술관이 2010년에 입수한 방명록을 <윤상 서화첩>이란 이름으로 대중에게 처음 공개했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의 「공사립미술관 보존지원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7개월여에 걸쳐 클리닝, 표지 배접, 재장정, 포갑 제작 등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말끔하게 새단장했다. 이어 방명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 생몰년, 직업, 이력 등 기초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한학자 하영휘 전 성균관대 교수의 탈초와 감수를 거쳐 소장품 전시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에서 선보인 것.
전시 출품작 64점 가운데 7점의 사진이 당시 신문에 실렸다. <윤상 서화첩>에 있는 신문 스크랩에서 볼 수 있다. 미술관은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전시 리플릿을 통해 장욱진의 <가족>(1954)과 유영국의 <도시>(1955) 두 점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장욱진의 <가족>은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연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에 출품된 개인 소장품으로, 전시 리플릿과 신문 사진을 통해 당시에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출품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유영국의 <도시>는 개인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윤상 서화첩>에 남은 화가들의 그림이 자못 흥미롭다. 천경자의 그림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작품이 많이 나가지 않어 퍽 섭섭합니다.” 전시를 통해 그림을 팔았다는 건데, 기대보다 판매가 저조했던 모양이다. 박래현은 열매 두 개를 먹으로 운치 있게 그리고 이런 글귀를 썼다. “결실을 축하하며 앞날의 발전을 기대합니다.” 전형적인 덕담이다. 그림마다 화가들의 개성이 담겨 보는 즐거움이 크다.
전시가 열린 1956년 당시 미술계는 이른바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 이른바 홍대파와 서울대파로 나뉘어 《국전》의 주도권을 둘러싼 분규에 휘말렸다. 하지만 전시에는 양쪽이 모두 참여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전시 리플릿 소개 글은 대한미술협회 위원장이었던 도상봉이 썼고, 협회를 대표하는 고희동의 작품이 1번으로 전시됐다. 동시에 이들과 대립각을 세운 한국미술협회 소속의 박득순, 장욱진, 문학진, 이세득, 김병기 등 서양화가들의 그림도 나란히 전시장에 걸렸다. 미술관은 “이는 계파와 세대를 초월해 전통과 현대를 이어가는 당시 한국 현대화단의 이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미술사 연구 범주를 넓혀준다는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방명록의 수준이 이렇게 높을 수 있는가. 방명록 그림으로 치부하고 말기엔 꽤 공들여 그린 것들이 많고 심지어 서명은 물론 인장까지 남아 있어 화가와 수집가의 돈독했던 관계를 엿보게 한다. 도대체 윤상이 어떤 수집가였기에 이쪽저쪽으로 나눠 싸우던 화단의 두 세력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었을까. 계파나 진영에 상관없이 다양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은 윤상은 상당히 그릇이 큰 인물이었던 것 같다.
또 하나 흥미롭게도 화가들이 방명록에 그려준 그림 가운데 윤상의 초상화가 여럿 보인다는 점. 임직순은 안경을 쓰고 담배 파이프를 문 모습으로 윤상의 얼굴을 그렸고, 박득순은 수염 더부룩하고 안경 쓴 윤상의 얼굴을 특징만 잡아 그리고 몸은 선 몇 가닥으로 얼버무려 놓았다. 김기창은 윤상의 옆얼굴을 그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볼 수 없지만, 미술관이 포스터에 쓴 이미지는 서양화가 차창덕의 그림이다. 최소한의 붓질로 얼굴의 특징을 잡아냈다.
이번 전시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전시장 입구에서 상영되는 비디오 작품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이다. 실험적인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알려진 김시헌 작가가 만든 15분 40초짜리 단채널 비디오로, 현재 남아 있는 흑백사진을 토대로 요즘 핫한 AI 기술을 활용해 수집가 윤상과 전시에 참여한 화가들의 모습을 짧은 영상으로 만들었다. 보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할 정도였으니, 화가의 유족이 본다면 감회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