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하고 성실한 화공’ 이만나의 그림 앞에서

석기자미술관(271) 이만나 《헤테로토피아: 신화가 된 회화》

by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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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떤 그림 앞에 멈춰 서 있다. 함박눈이 세상을 온통 뒤덮은 어느 날. 풍경은 흐릿하다. 밤새 내린 눈이 길과 길 아닌 곳을 가르는 경계를 지워버린 까닭에 저 그림 안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창고처럼 보이는 낮고 긴 건물이 화면 저쪽으로 멀어져 가며 길의 흔적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풍경은 어둡고, 낮고, 쓸쓸하다.


20260301_170211.jpg 이만나, <입체동 The 3D Studio Building>, 2014, 캔버스에 유채, 97×130.3cm



그림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점점이 뒤덮은 눈발이 화면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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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1층으로, 다시 1층에서 2층으로. 나는 반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반달갤러리’라 이름 붙여진 전시 공간을 유영하는 이방인이고자 했다. 그런데 다른 관람객들을 피해 2층을 먼저 본 뒤 1층으로 내려와 넌지시 작품들을 감상하던 찰나, 이 전시를 기획한 분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다. 기분 좋은 발각. 기획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법이다. 덕분에 화가와 그림에 관해 꼭 알아둬야 할 귀한 정보들을 얻었다.


어쩔 수 없이 내 모습이 사진이 담겼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


20260301_165930.jpg 이만나, <더 이상 거기에 없는 풍경>, 2020, 캔버스에 유채, 194×259cm



이 그림을 대면하는 순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서울 풍경화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찾은 그림이다. 화가의 이름은 처음 들어봤고, 그림에 관한 정보도 없었다. 2024년 선화랑 기획전에 출품된 사실을 확인하고 자료와 도판을 구해 놓고는 줄곧 잊고 있었다. 이 그림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는가. 묘한 경험이다. 우습게도 그런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존재한다고 가끔은 믿고 싶어진다. 그림은 서울 금호터널 앞 풍경을 보여준다. 2020년 작으로 돼 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 모습이다. 그림 아래 보이는 택시 모델이 그 증거다.


지금 저 자리에 다시 가면 몰라보게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그림 제목이 <더 이상 거기에 없는 풍경>이다.


20260301_170023.jpg 이만나, <가변 풍경>, 2022, 캔버스에 유채, 112×145.5cm



그림 속 풍경은 아름답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걸으면서, 또는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무심한 듯 스쳐 지나치는 무수한 날들 속의 한 장면일 뿐이다. 도시인에서 나고 자라, 도시에서 공부하고, 도시에서 그림 그리며 먹고 사는 화가가 어느 날 문득 마주친 풍경. 화가는 가만히 카메라를 들어 그 풍경을 사진에 담는다. 그 사진이 화가의 사진첩에 들어간다. 사진이 언제 다시 호명될지는 화가 자신도 모른다. 답을 아는 건 오로지 시간. 그리고 화가의 마음이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마치 전류가 흐르듯 낯설다는 느낌이 솟는 순간, 화가는 비로소 붓을 들어 사진 속 풍경을 캔버스로 옮긴다.


대수롭지 않은 풍경이어야 한다. 화가는 현실의 주변을 화면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20260301_170106.jpg 이만나, <성 The Castle>, 2012, 캔버스에 유채, 194×259cm



나의 작업은 늘 예기치 않은 대상과의 ‘우연한 맞닥뜨림’으로부터 시작한다. 분명 ‘이미 거기에 있어 왔던’ 평범한 대상들이지만, 처음 보는 듯한 생소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마치 이 비일상의 공간이 일상 곳곳에 숨겨져 나와의 대면을 기다린 듯, 우연히 불쑥 마주치게 된다. 그리그 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울림 같은 무언가가 나에게로 전해지고, 나를 사로잡는다.


우리 시대에 풍경을 그리는 이가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만나의 작업은 철저하게 어쿠스틱하다. 아날로그적이다. 오직 자신에게 새로운 낯섦을 선사한 장면을 캔버스에 붙잡아 두기 위해 화가는 굳이 유채 물감을 묽게 희석해서 화면에 아주 천천히, 조금씩, 느리게 바른다. 유채 물감의 장점을 거꾸로 희석해 버린다. 물감을 바르고 또 바르는 행위는 고독한 수행의 과정과도 같다.


그림 하나가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과작(寡作)이다.


20260301_165915.jpg 이만나, <길가>, 2025, 캔버스에 유채, 130.3×194cm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미궁에 빠진다. 세상 이치가 그랬다. 시장에서 비싸게 팔리는 그림 가운데 상당수는 나를 더 깊은 미궁에 빠뜨린다. 무엇이 좋은 그림이고, 무엇이 값나가는 그림인가. 그림의 예술성과 상업성이 비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나는 시시때때로 혼란에 빠진다. 미술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그림에서 정작 자신이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말하지 않는다. 설명과 분석만 넘쳐날 뿐 ‘감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림을 보는 눈은 점점 흐릿해진다.


이만나의 그림이 나는 좋았다. 이만나의 그림은 내게 ‘좋은 그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20260301_170136.jpg 이만나, <그림자>, 2004, 한지에 목탄과 아크릴, 159×254cm



이만나를 회화 원리주의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만나의 그림에서 정직하고 성실한 화공의 붓질을 본다. 아날로그 카메라로 찍은 필름을 꺼내 어두컴컴한 암실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사진을 한 장 한 장 뽑아내는 어느 사진가의 손길을 떠올린다. 사진가가 포착한 장면은 단숨에 짠~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인화지 위로 아주 느리게, 천천히, 조금씩 형상을 드러낸다. 이만나의 그림도 그렇다.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치고 격려하며 수없이 많은 붓질로 물감을 겹겹이 쌓고 또 쌓아 올린 끝에 풍경은 비로소 캔버스 위에 모습을 비춘다.


이만나의 그림은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다. 우리 시대에 그 기다림은 귀하다.


20260301_170344.jpg 이만나, <모퉁이>, 2025, 캔버스에 유채, 27.3×49.9cm



30년 동안 오롯이 구상 회화에 매달려 온 화가. 디지털을 넘어 AI가 모든 걸 집어삼킬 듯 질주하는 시대의 중력을 화가는 보기 좋게 거스른다. 전시 기획자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모든 것이 스크린으로 환원되는 디지털리티 시대, 평면에 세계를 구축하는 회화의 힘을 믿으며 충실히 작업에 임하는 이만나의 태도는, 일상 부조리에 맞서 끊임없이 반항하며 각자의 행복을 찾아가는 우리의 평범한 삶과도 맞닿아 있다.” 전시 기획자의 그런 눈이 나를 전시장으로 이끌었다.


저 메마르고 쓸쓸한 풍경에서 나는 온기를 느낀다.


20260301_170406.jpg (좌) 이만나, <모퉁이>, 2008, 종이에 아크릴, 13×21cm (우) 이만나, <모퉁이>, 2024, 종이에 수채, 14×21cm
20260301_170425.jpg 이만나, <첫 봄 밤>, 2020-2021, 캔버스에 유채, 60.6×291cm
20260301_170501.jpg (왼쪽부터 시계방향) 이만나, <모퉁이>, 종이에 연필과 아크릴, 48×69cm, 58×38cm, 42×69cm
20260301_170649.jpg 이만나, <두 갈래 길>, 2011,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2ea)
20260301_170709.jpg 이만나, <벽 16-1>, <벽 16-2>, <벽 16-3>, 2016, 캔버스에 유채, 각 130.3×162.2cm
20260301_170727.jpg 이만나, <모퉁이>, 2003, 종이에 아크릴, 111×100cm


■전시 정보

제목: 이만나 《헤테로토피아: 신화가 된 회화》

기간: 2026년 2월 27일(금)~4월 26일(일)

장소: 성남큐브미술관 반달갤러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성남대로 808)

문의: 031-783-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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