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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Mar 30. 2020

“이중섭만큼 유명하진 않아도”…‘소’를 그린 화가들

오랜 세월 인간과 가장 가깝게 지낸 동물로 크게 네 종류가 있습니다. 개, 소, 닭, 그리고 돼지입니다. 이 중에서도 개와 소, 닭은 옛 그림에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화가들이 인간과 가깝게 지내는 동물을 그리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죠. 지금도 화가들은 동물을 그립니다. 특정 동물을 줄기차게 그리는 화가의 경우 그 동물이 화가의 전매특허가 되는 경우도 흔하고요.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이중섭입니다. 이중섭 하면 사람들은 대번 ‘소’를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그만큼 이중섭의 소 그림은 비싸기도 하고 유명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중섭만 소를 그렸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소 그림이 이중섭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중섭 외에도 소를 그린 화가는 꽤 많습니다.     


얼마 전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가나 아트 컬렉션 I – 한국 근현대 미술>이란 주목할 만한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만, 가나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근현대 미술 작품 가운데 김환기, 박수근, 권진규를 포함한 작고 화가 23명의 작품 50여 점을 선보였죠.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는 가나의 소장품은 과거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일부 전시된 적이 있고, 2018년에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공개돼 큰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일부러 모은 것은 분명 아닐 텐데도 2018년 제주 전시회 당시에 발간된 가나 소장품 도록을 넘기다 보니 ‘소’ 그림이 제법 눈에 띄더군요. 단일 모델로는 가장 많이 그려진 소재가 아닌가 합니다. 당연히 궁금증이 생기죠. 도대체 화가들은 왜 그토록 ‘소’를 즐겨 그렸을까?     


대체로 화가들이 소를 묘사한 방식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뉩니다. 첫째는 인물 초상화처럼 소를 어엿한 주인공으로 묘사한 경우, 둘째는 인간과 소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 경우, 셋째는 풍경의 부분으로 소를 그려 넣은 경우입니다. 첫 번째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중섭의 소 그림이 될 텐데요.     


김경 <소>, 1954, 캔버스에 유채, 80×102.5cm, 가나문화재단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소’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김경(金耕, 1922~1965)이란 화가의 작품입니다. 이중섭의 소를 떠올려 본다면 참 얌전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소를 묘사했죠. 경남 하동 출신으로 잠시 일본에 유학했다가 도중에 그만두고 귀국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많은 화가가 그랬던 것처럼 6·25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내려가 그 지역 화가들과 의기투합해 세 차례 동인전을 열기도 했답니다.   

  

향토적 서정이 가득한 김경의 작품 세계에서 ‘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를 소재로 한 작품이 상당히 많이 전합니다. 가나 소장품 가운데도 두 점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6·25전쟁이 끝난 이듬해에 완성된 이 작품은 도록의 해설을 그대로 인용하면 “전후의 비극적 상황에서 화가의 생의 의지를 드러내는 선언문과도 같은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김경 <소>,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36.5×23cm, 가나문화재단

  


그런가 하면 이 작품은 또 다른 의미에서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합니다. 마치 벽화나 부적에서나 볼 법한 소의 얼굴만을 부각한 독특한 구도의 작품이죠. 작품 해설에는 “소의 우직한 성품과 이에 대응하는 골격의 강인한 조직에 김경은 화가로서 자신의 자아를 투사했다.”라는 평이 붙어 있습니다. 저는 이 그림에서 화가의 자화상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 그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화가는 양달석(梁疸錫, 1908~1984)입니다. 역시 일본 유학을 했고 부산의 1세대 서양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양달석도 향토적 서정이 두드러진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농촌풍경을 주로 그려 ‘소와 목동’의 화가로 불린다는군요. 가나 소장품 넉 점 가운데 석 점에 소가 등장할 정도로 양달석 역시 소를 즐겨 그렸습니다.     


양달석 <소와 목동>, 연도 미상, 한지에 수묵채색, 74×100cm, 가나문화재단



앞서 화가들이 소를 묘사한 방식 세 가지를 설명해 드렸죠. 그 가운데 이 그림은 인간과 소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 두 번째 경우를 보여줍니다. 굳이 목동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어린이들의 자세가 천차만별입니다. 등에 올라앉아 피리를 부는가 하면, 소머리 쪽으로 바짝 엎드린 아이도 보입니다. 인간과 소의 친밀감을 이렇게까지 표현한 그림이 어디 있을까 싶네요. 굳이 소와 아이들을 구분할 필요도 없는, 그것 자체로 목가적 풍경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양달석 <소와 아이들>, 연도 미상, 한지에 수묵채색, 41×32cm, 가나문화재단



이 그림에서도 역시 화가는 아이들과 소를 굳이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소는 소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개울물이 흐르는 자연 안에 평화롭게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동물이나 가축에게는 없는 ‘소의 특별함’을 확인할 수 있죠. 이런 시선의 기저에는 분명 한국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공통된 '정서적 토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 즉 향수(鄕愁)입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추억일 수도 있고, 북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의 향수일 수도 있겠죠. 좀 더 큰 틀에서 보자면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순수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고, 더 크게 보면 결국 우리가 깃들어 살아가고픈 이상향일 그린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소재로 화가들은 '소'를 선택한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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