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너머북스, 2018)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유교 문화의 근원은 무엇인가. 십중팔구 자신은 양반 가문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풍토가 아직도 잔영처럼 남아 있는 이유는 뭘까. 도저히 디지털화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같은 가문에서 나온 족보의 세부 내용이 천차만별인 현실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제 일상생활에서 ‘유교적’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사기 십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뼛속 깊이 각인된 유교적 전통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살고 있죠.
세계적인 한국학자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교수가 쓴 회심의 역작 《조상의 눈 아래에서》는 한국인이라면 오래전부터 품어 왔을 이런 여러 가지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저자는 신라 초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한국의 엘리트 계층이 어떤 문화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변화했는지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스스로 던진 결정적인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출사하여 나라를 위해 일할 것인가. 아니면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할 것인가. 저자는 영남의 안동과 호남의 남원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어 엘리트층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합니다.
“훗날 각자의 공동체에서 재지 엘리트들로 알려지게 되는 자들의 선조 격인 모든 이주자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경력의 궤도가 반드시 수도를 거쳤다는 것이다. 조상의 음덕을 입거나 과거에 급제하거나 군공을 세워, 중앙에서 일정 기간 직무를 수행하는 것 – 모든 위신과 권력의 원천 – 이 한 개인의 높은 사회적 신분을 공인받는 필수적인 요건이었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그는 자신이 속한 출계집단의 생명력 있는 지방 분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저자는 가부장, 남존여비와 같은 문구로 표현되는 남성 중심적 사회 구조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를 임진왜란 이후로 봅니다. 두 차례 왜란으로 황폐해진 여건 속에서 토지 부족과 상속재산의 분할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적 전략’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다수의 출계집단에서 본계의 존속이 위태로워지자, 불안감을 느낀 아버지들은 아들을 통한 혈통의 승계를 의식하여 딸보다 아들을 우대하기 시작했다. 이는 남계친으로만 구성된 친족집단의 창출을 향해 나아가는 의미심장한 첫발자국이었고, 궁극적으로 주희의 『가례』가 제공하는 이데올로기적 논거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파이는 정해져 있는데 나눠줘야 할 후손이 많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잘게 쪼개는 수밖에 없겠죠. 부의 원천은 땅이었습니다. 일정한 몫을 보장하려면 입을 줄이는 수밖에요.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공평하게 나눠주는 관행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토지 파편화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죠. 딸들의 상속권은 이렇게 서서히 박탈됩니다.
“출계집단의 지속적인 경제적 쇠퇴를 막고 장기적인 생존책을 확보하기 위해, 딸의 지분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조치가 방어적 전략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딸의 상속권 박탈은 그녀를 남편의 재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친정의 명성을 손상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분명히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17세기에 부쩍 늘어난 중도적 해법은 아들(특히 맏아들)에게 재산을 미리 별급함으로써 상속할 유산을 줄이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상속 통로에서 벗어난 그런 식의 재산 양도-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별도의 문서들로 보증된-는 유산의 균분이라는 전통적인(그리고 법적인) 원칙을 분명하게 뒤집었다.”
사대부 엘리트층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은 과거제도 채택과 신유학의 도입이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특히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학문적 영향력은 본인뿐만 아니라 퇴계를 따른 제자들에 의해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 되죠. 퇴계가 당대와 후대 유학자들에게 끼친 지적, 정신적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퇴계 자신도 관직에 나갔다가 물러나길 반복했지만, 퇴계가 남긴 진정한 유산은 ‘유학자 선비’의 사회적 위상을 일신했다는 점일 겁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퇴계의 유산은 무엇보다도 학자와 관리를 분리시킨 것이다. 현인이 되려는 영적 추구를 관리로서의 경력에 대한 정당한 대안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는 그런 추구에 사회적 가치를 부여했다. 이로써 학문의 탐구는 관직의 보유 못지않게 엘리트 신분을 보장해주는 어엿한 수단이 되었다. 사대부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모든 사람이 처사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므로), 퇴계는 예전의 주희처럼 사(士)의 의미를 ‘정치적’ 인간에서 ‘개명된’ 인간으로 바꿔놓음으로써, ‘진정한 학문’의 추구를 사족 엘리트층의 성원에게 어울리는 천직으로 합리화했다. 과거 급제와 관직 보유를 신분 유지의 관건으로 보던 당대 사회의 고정관념에 맞서, 퇴계는 그의 제자들을 학문 수양으로 얻어진 우월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도자 역할을 맡을 권리를 주장하는 독립적인 행위자인 ‘사’(우리말로는 선비)로 변신시켰다. 유(儒)의 혜택을 누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문화적으로 탈바꿈시키기에 이르렀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임진왜란이라는 끔찍한 재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로 저자는 ‘긴밀하게 연결된 사족들의 주도하에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무리로 조직된 의병의 지역적 대응’을 꼽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안동이 배출한 두 인물인 김성일과 유성룡은 두 차례 왜란을 통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그런 선조의 명성에 힘입어 대대손손 이어질 가문의 영광을 다질 수 있게 되죠. 두 차례 왜란과 두 차례 호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참담한 무능과 달리 지역 공동체의 끈끈한 결속이야말로 위기 극복의 원동력이었다는 게 저자의 진단입니다.
“그런 전쟁들(왜란과 호란)이 중국에서는 이민족의 통치로, 일본에서는 새로운 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졌으나, 조선은 놀랍게도 양국의 도전을 견뎌내고 200년 이상 존속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에 이토록 대단한 복원력을 부여했을까? 그 답은 다시 한번 재지 엘리트 친족집단들-안동과 남원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이 엄청난 역경에 직면했을 때 보여준 내구성과 내적 결속에서 찾아야만 한다. 조정은 전국적인 저항을 ‘국가의 대의’로 내세워 군사력을 결집하고자 했지만, 결국 나라를 구한 것은 결의에 찬 각 지방의 자위군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경남 함양의 선비 정경운(鄭慶雲, 1556~?)이 쓴 일기 《고대일록 孤臺日錄》을 보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전쟁의 와중에도 수많은 제사를 지낸 기록이 보입니다. 도저히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한탄을 토로한 대목도 상당히 많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난리 통에도 조상을 기리는 일을 존재의 이유이자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했던 조선 엘리트층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전쟁으로 모든 게 황폐해져 지독한 가난을 피할 수 없게 된 시골 선비는 양반임에도 먹을거리를 구걸해야 했죠. 생계를 위해 소금도 팔고 무명도 팔고 생선도 팝니다. 그런 와중에도 양반 사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려 애썼다는 사실에 경외감마저 듭니다.
이후 안동을 위시한 영남 남인과 노론의 정치적 분화와 갈등 속에서 퇴계의 학문적 후계자들은 갈수록 고립됩니다. 세상은 몰라보게 빠른 속도로 변해갔지만, 돌파구는 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인은 패배합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가문의 영광을 지키기 위한 돌파구의 하나로 사족들은 ‘족보’ 만들기에 매달립니다. 그런데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저자는 조선 후기에 양반 계층 비율이 70%까지 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무지에 의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직함이 상품화되고 그 결과 호칭체계가 무너지자, 직역은 개인의 사회적 신분을 더 이상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었다. 모든 호적이 변조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런 문서에 기초하여 조선 후기 신분이동의 폭을 가늠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과거에는 그런 식으로 조사가 이뤄졌기 때문에,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한국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양반이 된 것으로 보인다는 믿기 어려운 결과가 도출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 표명된 한국사에 관한 통찰들은 음미할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왕조 교체기에 유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대부 세력이 구체제 옹호 세력을 대체했다는 식의 설명은 버려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교정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종족 형성의 동력은 조상숭배의 관행이었다. 제사는 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조상의 위신이라는 힘을 불어넣어준 핵심적인 ‘종교적’ 행사였다. 본인들의 조상을 산소, 가묘, 사우에서 봉행되는 성대한 의례를 통해 기림으로써, 종족의 성원들은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며 조상의 가호에 자신들을 맡겼다. 그들은 그야말로 ‘조상의 눈 아래에서’ 살았다.”
어느 날 차에서 듣고 있던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책을 사서 읽었죠. 물론 시간이 꽤 필요했습니다. 한창 책을 읽어가는 와중에 저자인 마르티나 도이힐러가 쓴 또 다른 책이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한국인 남성과 짧은 결혼생활을 한 도이힐러 여사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67년 혼자서 시댁 방문을 겸해 한국을 찾아옵니다.
그때 이후로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해 찍은 사진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 바로 이번에 국내에 출간된 《추억의 기록 – 50년 전 내가 만난 한국, 사진 속 순간들》(서울셀렉션, 2020)입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저자의 책 두 권을 같은 시기에 나란히 읽었습니다. 인연의 독서라고 해야 할까요. 만약 라디오를 통해 《조상의 눈 아래에서》를 알지 못했다면, 《추억의 기록》을 들춰볼 일도 없었겠죠. 연결의 독서는 책을 읽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작은 특권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