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가나문화재단 소장품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아주 특별한 그림 한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수억이라는, 제게는 조금 생소한 화가가 그린 <6․25 동란>이란 작품이었습니다.
전쟁 피난민 행렬을 옆에서 본 구도로 그린 작품입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갑니다. 하나같이 눈과 코와 입이 없죠. 그들은 철저한 익명이었습니다. 피난민 행렬의 비극이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보편적인 비극이었다는 뜻입니다. 소실점이 없는 화면 안에서 저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저 고통스러운 여정의 끝에는 과연 희망이 있는 걸까.
피난민 행렬의 선두에서 수레를 끄는 남자부터 맨 뒤에서 마찬가지로 수레를 끄는 남자까지 인물들의 몸은 일정한 각도로 기울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인 여인네를 비롯한 몇몇을 빼면 피난민들은 땅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걷고 있을 뿐이죠. 화면 가운데 아이를 업은 소녀와 등에 업힌 아이의 모습에서 피난길의 고단함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 뒤에서 책가방을 멘 채 뒤따르는 소년의 모습도 마찬가지고요. 피난민 행렬의 비극적 상황을 이토록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가나문화재단이 펴낸 소장품 도록 《가나 아트 컬렉션 I》의 설명을 봅니다.
“피난민들을 모티프로 제작한 그림들은 전후 한국회화, 특히 황유엽, 장리석, 윤중식 등 월남 미술가들의 회화에 폭넓게 나타나지만, 이 역사적 비극을 귀로나 망향 등의 제목을 붙여 다만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여타의 화가들과는 달리 <6․25 동란>은 명시적으로 현실을 직시하여 대작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민족적 수난의 기록으로 자리매김 됐다.”
제가 이 그림의 평행 구도에 주목한 이유는 유사한 구도로 그려진 6․25전쟁 시기의 그림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중섭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길 떠나는 가족>입니다.
피난길을 그렸음이 명백한 이 그림 또한 옆에서 본 수평 구도입니다. 이수억의 <6․25 동란>이 전쟁의 비극을 직설적으로 표출했다면, 이중섭은 피난길마저 즐거운 나들이로 승화시켰습니다. 전쟁이 끝났어도 여전히 가족과 재회하지 못한 이중섭의 염원을 담은 그림이죠. 앞에서 구 달구지를 끄는 사람은 바로 이중섭 자신이고, 달구지에 탄 여인과 소년 둘은 이중섭의 가족입니다. 우리가 <길 떠나는 가족>으로 알고 있는 그림은 모두 석 점입니다. 위의 두 점 외에 나머지 하나는 이중섭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안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림 아래 편지는 이런 내용입니다.
“야스카타(태현)에게
나의 야스카타. 건강하겠지. 너의 친구들도 모두 건강하고. 아빠도 건강하다. 아빠는 전람회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아빠가 오늘-(엄마, 야스나리(태성), 야스카타(태현)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앞에서 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에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 소 위에는 구름이다.) 그럼 안녕. 아빠가.”
다정하기 그지없는 아버지 이중섭의 편지는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얼마나 가족을 보고 싶었을까. 한순간도 포기할 수 없는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이중섭은 “따뜻한 남쪽 나라에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라고 썼습니다. 《이중섭 평전》을 쓴 미술사학자 최열은 이 구절을 근거로 작품 제목을 <남쪽 나라를 향하여>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제목이야 어찌 됐든 이 그림은 이중섭의 비극적인 개인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즐거운 나들이는 이중섭의 염원이자 바람이었을 뿐,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 꿈은 끝내 실현되지 않습니다. 그 또한 전쟁이 낳은 비극이었죠.
한국에서 가장 비싼 작가가 된 김환기의 작품 가운데서 단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바로 이 그림 <피난열차>를 선택하겠습니다. 역시 지금까지 봐온 수평 구도의 작품이죠. 이 기차는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가고 있는 건지 서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죠. 카메라로 포착해낸 정지된 화면처럼 시루떡 같은 열차에 피난민들이 빼곡하게 타고 있습니다.
형체만 있을 뿐 표정이 보이지 않는 얼굴들도 위에서 본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죠. 전쟁의 와중이라고는 믿기 힘든, 피난 행렬이라고도 보기 힘든 저 낯선 풍경은 언뜻 목가적으로 보이기조차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직접적으로 비극의 현장을 묘사한 그 어떤 그림보다도 더 짙게 드리워진 비극의 실상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그게 예술이 아닐까 합니다.
화가는 이 그림에 그 어떤 거추장스러운 것도 그려 넣지 않은 채 오로지 푸른 하늘과 핏빛으로 물든 땅과 열차와 피난민만을 채워 넣었습니다. 열차는 떠날 수 있을까. 언제, 어디로 가게 될까. 살기 위해 열차에 오른 저들은 과연 어딘지 모를 목적지에서 또 다른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쟁통에도 화가들은 그림을 그렸죠. 어떤 그림은 사라졌지만, 어떤 그림들은 살아남았죠. 덕분에 제 기억에는 없는 전쟁의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이 그림들 외에 수평 구도로 그려진 그림을 더 소개합니다. 두 점 모두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그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