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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Jun 01. 2020

지팡이 안에 칼이 숨어 있는 조선시대 유물이 있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더 놀랐죠. 조선시대에는 일흔이 넘은 신하에게 공경과 예우의 뜻을 담아 나라에서 지팡이(杖)와 의자(几) 등을 내려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둘을 묶어서 궤장(几杖)이라 불렀죠.  문제의 유물은 조선 중기 문신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현종 9년인 1668년 11월에 임금으로부터 받은 궤장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찾아보면, 이경석은 처음엔 궤장을 안 받겠다며 거절했습니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여 궤장 하사의 명을 사양하였으나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소까지 올려 사양하겠다고 했지만, 왕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에게 궤장(机杖선교(宣敎선온(宣醞일등사악(一等賜樂)을 모두 예의(禮儀)와 같이 하사하였다경석은 인조조의 대신이었는데이때의 나이가 일흔넷이었다비록 산반(散班)에 있었지만 문안하는 행사에 언제나 참석하였는데 근력이 미치지 못하여 걸음걸이가 심히 어려웠다식자들이 그의 성의는 아껴주었으나 물러나지 않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전례에 맞춰 궤장 등을 하사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때 이경석이 받은 것 가운데 지팡이 4개, 의자, 이 물건을 하사하는 장면을 그린 화첩까지 유물 6점이 <이경석 궤장 및 사궤장 연회도 화첩 (李景奭 几杖 및 賜几杖 宴會圖 畵帖)>란 이름으로 1987년 보물 제930호로 지정됐습니다.     


칼이 든 지팡이(도장, 刀杖)


지팡이 넉 점 가운데 새 머리 장식이 달린 조두장(鳥頭杖)이 한 점, 특별한 장식이 없는 지팡이가 두 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문제의 ‘칼이 든 지팡이’입니다. 칼이 들었다 해서 도장(刀杖)이라 부르는 이 지팡이는 겉으로 보면 다른 지팡이와 다를 게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지팡이 안에서 길이 60cm짜리 칼이 나옵니다.     


궤장 풍습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할 정도로 유구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신라 문무왕 4년인 664년에 김유신이 받았다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하는데요. 이 전통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졌고, 조선시대에는 아예 『경국대전』에 법제화하고 『국조오례의』에 규격까지 정해 놓았습니다. 자격 조건은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 70세 이상으로서 국가의 대소사에 관계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의자(궤, 几)



연로한 신하에게 계속 일을 시키자니 적잖이 미안했을 겁니다.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계속 조정을 위해 일하란 뜻에서 거동이 불편한 원로대신에게 몸을 의지할 도구로 의자와 함께 지팡이를 내려준 거죠. 그런데 ‘칼을 품은 지팡이’를 준 까닭은 뭘까. 호신용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연로한 신하에게 지팡이를 주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칼이 든 지팡이를 준 건 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합니다.     


앞에 인용한 실록의 기사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봅니다. “식자들이 그의 성의는 아껴주었으나 물러나지 않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연로했는데도 물러나지는 않는 이경석의 태도를 은근히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이 실록 기사 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이경석을 위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청하였다상이 옛 사례를 물으니규령이 이원익(李元翼)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김상헌(金尙憲)에게 견여(肩輿)를 하사한 일로써 대답하였다상이 또 대신에게 물으니송시열이 대답하기를,     


자기 나름대로 옛날 일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곤란하나성인도 때에 따라 변통하여 바꾸었습니다옥당의 관원이 선조(先祖)의 고사를 이미 아뢰었습니다만경석에 대한 전하의 관계가 원익에 대한 인조의 관계나 상헌에 대한 효종의 관계와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낫겠습니까오직 성명께서 헤아려서 처리하시는 데 달려있을 뿐입니다.” 하자상이 이에 궤장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왕이 송시열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송시열의 대답을 요약하면 이원익이나 김상헌과 비교할 수 없지만, 선택은 임금님께 달려있으니 임금님 뜻대로 하시라는 얘기입니다. 왕은 이경석에게 궤장을 하사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실록의 기사를 읽어보면 송시열이 이 문제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 양공(兩公)은 모두 원로 숙덕(宿德)으로서 조야가 중히 여겼고 양 조정에서 예우함이 특별하여 이같이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그러므로 시열은 경석이 이 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경석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을 올리고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구하자시열이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 일을 인용하여 기롱하니식자들은 그르게 여겼다.    

 

송시열은 대놓고 이경석을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송시열만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사관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삼가 살피건대이경석이 여러 해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볼 만한 사업이 없는 데다 일컬을 만한 건의도 없어 단지 대신의 숫자만 채웠을 뿐이었다그렇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조정에서 남다른 예로서 대우하고 궤장을 하사하는 것은 진실로 지나치다시열이 임금 앞에서 대답한 말을 보면 경석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는 뜻이 있는 듯하다.     


이경석을 예우하는 일을 반대한 까닭이 분명하게 적시돼 있죠. 뚜렷한 공로도,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없었는데도 단지 연로하다는 이유로 예우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겁니다. 사관은 그러면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차릴 만한 문구로 이경석을 조롱하고 깎아내린 송시열의 태도도 함께 꼬집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구란 대체 뭘까. 앞에서 지팡이와 함께 보물로 지정된 유물 가운데 화첩이 있다고 소개해 드렸습니다. 바로 이 화첩의 서문을 송시열이 씁니다. 이경석의 부탁을 받아서 말이죠. 실록은 이렇게 전합니다.     


경석은 세상에서 드문 은전을 입고 시열의 말 한마디를 얻고자 하여 글을 구하였으니시열은 참으로 경석을 적합지 않다고 여겼다면 그 구함에 응하지 않아도 괜찮은데그 기록한 글 가운데다 심지어 손적의 일을 인용하면서 그 성명은 쓰지 않고단지 오래 살며 강건했다.[壽而康]’는 서너 자를 써서 기롱 폄하함으로써 경석이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또한 어찌 정인 길사(正人吉士)의 마음 씀이겠는가.     


『사궤장연회도』 표지


임금의 큰 은혜를 입어 당대 최고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송시열에게 어렵게 글을 부탁했더니 글쎄 이름도 쓰지 않고 ‘오래 살며 강건했다’고만 적었으니 축하할 뜻이라곤 전혀 없다고밖에 볼 수 없는 내용입니다. 마지 못해 썼다는 거겠죠. 아무튼, 왕은 궤장을 내려주고 연회를 베푸는 장면을 그리게 한 뒤 화첩으로 묶어 이경석에게 함께 줍니다. 『사궤장연회도』란 제목이 붙은 이 화첩에는 그림 석 점이 실려 있습니다.     


『사궤장연회도』 중 「지영궤장도」

    

『사궤장연회도』 중 「선독교서도」


『사궤장연회도』 중 「내외선온도」

    

일흔 넘어까지 장수하고 임금에게 귀한 물건까지 하사받은 일은 실로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겠죠. 그 유물들이 후손들에 의해 대대로 잘 보존돼 지금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는 것도 대단한 일이고요. 게다가 논란과 우여곡절 끝에 전해진 ‘칼을 품은 지팡이’는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유물인 데다 화첩까지 함께 전해지고 있어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이 귀중한 유물들은 현재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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