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낳은 천재이자 이단아였던 허균(許筠, 1569~1618). 더 나은 세상을 꿈꾼 허균의 마지막 날들은 김탁환의 장편소설 『허균, 최후의 19일』(민음사, 2009)을 통해 감동적으로 되살아났습니다. 김탁환은 이후 대하소설 『불멸의 이순신』(민음사, 2014)에서도 허균을 중요한 인물의 하나로 등장시키죠. 김탁환만큼 허균을 깊이 들여다본 작가가 없을 듯합니다.
허균은 한양의 건천동에서 태어난 서울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을 수시로 오가며 각별한 인연을 맺었죠. 김탁환 작가가 꼼꼼하게 정리해둔 연보를 보면, 허균은 임진왜란이 터진 1592년, 어머니와 아내와 딸을 데리고 함경도로 피난을 갑니다. 피난길에 아들을 얻었지만, 아내와 아들은 죽습니다. 그 뒤로 산전수전 겪다가 강릉에 머물게 되죠. 이때부터 수시로 강릉을 왔다 갔다 합니다.
허균이 강릉에서 남긴 글 가운데 도서관을 지은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허균의 시문을 모아 후대에 펴낸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 권6의 문부(文部)에 실린 「호서장서각기 湖墅藏書閣記」입니다. 원문과 번역문을 차례로 옮겨봅니다.
江陵。嶺海之東一大都會也。新羅時爲北濱京。又號東京。自周元受封以來。賁飾侈觀。谹麗傑特。與上京相埒。又俗尙文敎。衿裾鉛槧之士。出騖於詞場者。比踵林立。風尙敦厚。敬老尙儉。民樸愿無機巧。且饒魚稻之產。不獨山川之勝甲於東方而已。故吏玆土者。率戀戀於是。其去也有泣者。故有員泣峴存焉。蓋可懲也。
강릉(江陵)은 영해(嶺海)의 동녘에 있는 큰 도회지이다. 신라 때에는 북빈경(北濱京)이었으며, 동경(東京)이라고도 불렀다. 김주원(金周元)이 봉(封)을 받은 이래 꾸민 장식과 사치한 외관이 화려하고 특출하여 서울과 비슷하였으며, 풍속이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의관과 문필을 갖춘 선비로서 사장(詞場)에 몰려드는 자들이 줄을 이어 늘어설 지경이었다. 풍속이 돈후하여 노인을 공경하고 검소함을 숭상하며, 백성들은 소박하고 성실하여 기교(機巧)가 없었다. 어업과 쌀의 생산이 풍요로워 비단 산천의 아름다움이 동방에서 으뜸일 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지방에 관리된 자들은 대개 여기를 못 잊어하여, 떠날 때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으므로 원읍현(員泣峴 원님이 울고 가는 고개)이 생겨 지금도 있으니, 대개 그 증거가 될 만하다.
강릉이라는 고장의 역사와 풍속, 경제, 환경 등을 간략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허균이 강릉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죠. 이렇게 먼저 강릉을 소개하는 이야기를 풀어놓은 까닭은 다음에 올 일화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계속 읽어봅니다.
柳侯寅吉莅此府。淸嚴仁恕。民戴以爲慈母。嘗以振起文敎爲己任。訓奬課勸不少懈。士子多奮起者。
유후 인길(柳侯仁吉)이 이 고을에 부임해서 청엄(淸嚴)하고 인서(仁恕)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추대하여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생각하였다. 일찍이 문교(文敎)를 떨쳐 일으키는 것으로 자기의 소임을 삼고, 훈장(訓獎)과 과권(課勸)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선비들이 분발하여 일어나는 이가 많았다.
강릉부사를 지낸 유인길(柳寅吉, 1554~?)을 높이 평가하고 있죠. 청렴할 뿐 아니라 학식도 깊어서 특히나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허균과도 각별한 교분을 맺었던 것 같습니다. 아래와 같은 일이 있었던 걸 보면 말이죠.
瓜滿回也。以明蔘三十二兩付不佞曰。此貢羨也。不欲累歸橐子。其充藥籠之用。不佞曰。不敢私也。願與邑學子共之。笥而歸都下。
임기가 만료되어, 명삼(明蔘) 32냥을 내게 넘겨주며 “이는 공납하고 남은 것인데 돌아가는 짐에 누를 남기고자 아니하니 그대는 약용에 충당하라.”하기에 나는 “감히 사사로이 쓸 수는 없으니, 이 고을의 학자들과 같이 쓰고 싶소.”하고, 상자에 담아 서울로 돌아왔다.
허균의 「호서장서각기」를 소개하는 글은 대부분 이 대목부터 인용합니다. 임기를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는 유인길이 떠나기 전에 허균에게 명삼 32냥을 건네줍니다. 세금 내고 남은 건데 가지고 가기 뭣하니 약으로 쓰라고 준 겁니다. 명삼은 쉽게 홍삼(紅蔘)이라고 보면 됩니다. 어쨌든 받기는 받았지만, 개인적으로 쓸 순 없었죠. 이대로 그냥 써버리면 뇌물 착복이었으니까요. 그럼 허균은 어떻게 했을까.
因朝价之行。購得六經四子性理左國,史記,文選,李杜韓歐文集,四六通鑑等書於燕市而來。以騾馱送于府校。
마침 사신으로 가게 되어, 그것으로 육경(六經)ㆍ사자(四子)ㆍ《성리대전(性理大全)》ㆍ《좌전(左傳)》ㆍ《국어(國語)》ㆍ《사기(史記)》ㆍ《문선(文選)》,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한유(韓愈)ㆍ구양수(歐陽脩)의 문집, 사륙(四六)ㆍ《통감(通鑑)》 등의 책을 연시(燕市)에서 구해 가지고 돌아와, 이를 노새에 실어 그 고을 향교로 보냈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간 허균은 명삼으로 책을 잔뜩 사서 돌아와 강릉의 향교로 보냅니다. 원래 강릉에 속한 물건이니 강릉을 위해 쓰는 게 옳겠거니 여겼던 게지요. 하지만 일은 허균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校儒辭以不與議。不佞就湖上別墅。空一閣藏之。邑諸生若要借讀。就讀訖還藏之。如公擇山房故事。庶以成柳侯興學養才之意。俾衿裾鉛塹之士。比踵林立。如古昔盛時。則不佞與有其功。不亦幸歟。
향교의 선비들은 의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사양하므로 나는 호상(湖上)의 별장에 나아가 누각 하나를 비우고 수장하고서, 고을의 여러 선비가 만약 빌려 읽고자 하면 나아가 읽게 하고 도로 수장하여, 이공택(李公擇)의 산방고사(山房故事)와 같이 하였으니, 이로써 유후(柳侯)의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려는 뜻을 거의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의관과 문필을 갖춘 선비로 하여금 줄지어 늘어섬이 옛날의 흥성하던 시절과 같이 된다면 나도 그 공을 함께 지닐 터이니,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강릉 선비들은 책을 받지 않겠다며 거절합니다. 유인길과 허균의 거래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였죠.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허균은 강릉 별장 건물 하나를 비워 책을 넣어두고, 누구든지 와서 책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일종의 사설도서관으로 꾸민 셈이죠. 그것이 유인길이 강릉에 뿌린 교육열과도 부합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공공의 목적에 맞는 좋은 취지에 사용했다는 점을 강조한 대목입니다. 대부분은 여기까지만 인용되지만, 남은 글도 마저 읽어봅니다.
不佞阨於世議。官況索然。行將投紱東歸。爲蠹魚萬卷中。以了殘生。此書之藏。亦爲老僕娛老地。其可喜也已。諸生其函襲芸曝。不至失墜汚毀。則望氣者必言瑟羅故墟。有虹光燭天而貫月。當有異書在其下矣。謹記。
나는 불의에 액을 당하여 관운도 더욱 삭막하니 장차 인끈[印綏]을 내던지고 동녘 지방으로 돌아가서 만 권 서책 중의 좀벌레나 되어 남은 생애를 마치고자 하는데, 이 책의 수장이 또한 늙은 나의 노경을 즐길 수 있는 밑천이 되니 기뻐할 따름이다. 제생(諸生)은 아무쪼록 갑에 넣어 좀약을 치고 햇볕을 쬐어 잃어버리거나 훼손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한다면, 운기(雲氣)를 보고 점치는 자가 반드시 “비슬라(比瑟羅)의 옛터에 무지개빛이 하늘을 찌르고 달을 꿰니, 틀림없이 기이한 서적이 그 아래 있을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삼가 기록한다.
은퇴한 뒤에 강릉에 내려와 책이나 벗 삼아 유유자적 지내고자 하는 허균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됐으니까요. 2016년 9월, 강릉시는 허균이 장서각을 꾸몄을 것으로 추정되는 터에 ‘호서장서각 터’라는 안내판을 설치했습니다. 여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문장은 엉터리고, 과장은 심합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 1569~1618) 선생이 1604년 중국에서 구입해온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오늘날 사설도서관 격인 「호서장서각」이 있었던 곳이다. 「호서장서각」은 허균 선생이 만든 조선시대 유일의 사설 도서관으로 이곳 경포호수 옆 별장에 귀한 책 1만 권을 모아 당시 지역 향교의 교생과 유림들이 책을 빌려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허균 선생은 「호서장서각」을 짓고 ‘호서장서각기(湖墅藏書閣記)’라는 기문을 남겼는데 이를 통해 강릉지역이 예부터 책을 가까이하는 고을이었음을 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