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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ug 10. 2020

허균은 어떤 인물이었나?

정길수 편역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돌베개, 2012)

2017년 12월에 읽은 김탁환의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에서 가지 쳐 읽었습니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마음만 잔뜩 먹고는 시간이 꽤 흐르고 말았죠. 하지만 허균을 제대로 만나게 해준 소설은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이었습니다. 허균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허균, 최후의 19일》을 읽어야 하지만, 허균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불멸의 이순신》을 읽어볼 일입니다.     



허균은 흔히 비운의 천재라느니, 풍운아라느니, 여러 가지로 불립니다. 워낙 출중한 글솜씨를 지닌 까닭에 그리도 숱하게 벼슬자리에서 쫓겨났어도 매번 다시 불려가 나랏일에 쓰임을 받았죠. 전쟁통에 아내와 아들을 잃고 피난살이를 해야 했던 불우한 삶을 몸소 겪기도 했고요. 출세를 향한 욕망을 일부러 숨기지도 않았지만, 세상에 나가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유유자적하는 삶을 꿈꿨던 사람. 그래서 허균의 시에는 유독 초야에 묻혀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자주 보입니다.     


백 년도 못 사는 인생

외물(外物)에 얽매여 번민과 근심뿐.

명예도 이익도 부질없거늘

왜 빨리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

이번에 나랏일 마치고 나면

벼슬 버리고 깊은 산으로 돌아가리라. - <백상루 1>     


언제나 몸을 빼서 전원에서 늙을까

여러 해 전쟁에 풀려날 길 없네. - <진산강에서>     


올해 왕명 받고 두 번째 나왔지만

뜻에 안 맞다 감히 원망 못 하겠네. - <대정강>     


한스러워라 영원히 쉬지 못할 내 인생

허옇게 센 머리로 오늘도 나그네 신세. - <스님이 책 앞에 쓰다>     


역마 달리는 일 언제 끝나려나

고향 동산 꿈에서만 돌아갈 뿐. - <백상루 2>     


허균은 당대 제일의 독서가로도 유명합니다. 사실 벼슬살이에 미련이 없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편안하게 지내고 싶다는 바람은 독서를 향한 갈망과 곧잘 연결돼 있음을 허균의 여러 시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생 독서를 일삼아

다섯 수레 책이 늘 따라다녔지.

상자 열어 서가 가득 책 꽂아 놓고

한 권씩 펼쳐 보며 홀로 즐기네.

한석봉의 글씨는 북쪽 창에 걸고

이정의 그림은 동쪽 벽에 펼쳤네.


그 사람들 모두 세상 떴거늘

그 자취 어루만지니 한숨이 나오네.

글씨 그림 감상하고 유유자적 살며

애오라지 여섯 해 기다려야지.

이런 한가한 자리야말로 내 분수에 맞으니

임금님 은혜를 어찌 잊겠는가. - <게으른 관리>     


병든 몸으로 해마다 나그네길

늙어 가며 눈서리만 수염에 가득하군.

몸 늙는 거야 아무 상관없다만

눈 아파 책 보기 힘든 게 한스러워라. - <늙는 건 괜찮지만>     


새해 첫날 성학 책을 처음 보고

지난날의 허튼 생각 홀연 녹아 버렸네.

평생 삼천 권을 독파했지만

책벌레로 화()함이 마땅하여라. - <양명학 책을 읽고>     


여러 해 연이어 중국 가는 길 비록 힘들지만

옛사람 책 많이 얻어 오는 즐거움 있네.

가진 것 죄다 털어 책 산다고 비웃지 마오

나는 장차 책벌레가 되려고 하니.     


고향집 왜란 겪고 고서를 다 잃어

세상에서 보지 못한 책 얻고 싶을 뿐.

여기 와 산 책이 몇 만 권이니

등불 아래서 글 읽을 만하네. - <책 욕심 비웃지 말라>     


그러면서도 허균은 그 누구보다도 자존감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는 허균의 시 <내 삶을 살아가리니>에서 따온 것입니다. 유교는 물론 불교와 도교까지 두루 섭렵한 사상적 자유인이었던 허균은 그 때문에 끊임없이 탄핵을 당해야 했죠. 그럼에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니, 시대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으로밖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밤에 불경 읽어

집착하는 마음은 없으나

아내도 있고

고기도 먹는다네.

출세의 푸른 꿈 이미 버렸거늘

탄핵이 빗발친들 무슨 근심 있겠나.

내 운명 편안히 여기나니

서방정토 가고픈 꿈은 여전하다오.     


예교(禮敎)로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

부침을 오직 정()에 맡길 뿐.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따르라.

나는 내 삶을 살아가리니.

벗은 찾아와 위로하고

처자식은 마음이 안 좋구나.

그래도 얻은 게 있어 기쁘다오

이백과 두보처럼 이름을 나란히 했으니. - <내 삶을 살아가리니>     


개혁가 허균의 생각을 보여주는 <호민론>, <서얼론>, <군대론> 등은 지금 읽어도 무릎을 치게 만드는 명문들입니다. 게다가 허균은 당대 제일의 문학비평가이기도 했죠. 글쓰기에 관한 허균의 글도 일품입니다. 너무도 많은 재주를 한 몸에 입었던 탓일까, 허균의 마지막은 허망한 비극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 마지막 날들의 기록(분명 편향적인)이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김탁환의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은 허균의 마지막 생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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