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무 《난처한 미술이야기 1》(사회평론, 2016)
한마디로 놀라움을 주는 세계미술사 개론서. 우리도 이제 우리의 것으로 충분히 소화된 미술사를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사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는 전혀 눈여겨보지 않다가, 얼마 전에 우연히 1권을 펼쳐 들고 부담 없이 읽었죠. 읽고 나서야 왜 지금껏 이 훌륭한 미술사를 진작에 읽고 널리 소개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러울 정도입니다.
<미술하는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멋진 부제가 붙은 1권은 원시미술과 고대 이집트 미술, 메소포타미아 미술까지를 다룹니다. 저자는 철저하게 미술 중심주의적 사고를 견지하는 바,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을 빗살무늬토기의 장식적 측면이 기능적 측면에 앞선 본질적인 요소라고 이야기하죠. 일상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 미술은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미술의 ‘쓸모’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집트 미술의 유산 중에서는 ‘오벨리스트’라는 거대한 구조물에 주목했습니다. 세계 각지의 유명 관광지에, 심지어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도 하늘 높이 솟은 첨탑이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온, 워싱턴DC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구조물이죠. 오벨리스크의 고향은 이집트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신전을 건설하면서 신전 입구 양쪽에 오벨리스크를 세웠습니다. 그 수직 지향성이 뜻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신에게 바치는 봉헌물인 동시에 태양을 상징하는 구조물이었습니다.
놀라운 건 오벨리스크 하나가 돌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조각품이라는 점이죠. 고대 이집트인들이 돌을 다루는 솜씨는 알면 알수록 경이롭기만 합니다. 이 거대하고 멋진 구조물에 매료된 유럽인들은 역시나 마구잡이로 오벨리스크를 약탈해 갑니다. 저 큰 돌을 옮겨갈 생각까지 했던 걸 보면, 얼마나 반했는지 알 만하죠. 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로마의 성베드로 광장 한쪽에도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는군요. 약탈의 역사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부패와 탐욕의 상징 ‘바벨탑’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 대목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의 해당 구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입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타락의 상징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바벨탑은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빌론에 중심부에 우뚝 서 있던 지구라트(Ziggurat)라는, 30층 높이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탑입니다. 그동안 실제로 존재했었다, 아니다, 논란이 분분했다가, 최근 설계도가 새겨진 돌비석이 발견되면서 존재했다는 쪽으로 정리됐다고 하는군요. 더 놀라운 건 이런 엄청난 역사적 비밀을 품은 <바벨탑 석비>가 노르웨이의 한 개인 소장품이란 사실입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책의 장점은 분명합니다. 첫째, 미술에 문외한이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도판이 대단히 충실합니다. 도판 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부분을 어떻게 보면 좋을지까지 친절하게 그래프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미술과 친해지고 싶은 이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은 훌륭한 개론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