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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Oct 17. 2020

우리 옛 그림에서 찾은 ‘우는 얼굴’

     


그림 앞에서 울어본 적 있나요? 도대체 그림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미국의 미술사학자 제임스 엘킨스의 책 《그림과 눈물》에서 우리는 그 숱한 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이 자아내는 감동’은 이 자리에서 다루려는 주제가 아닙니다. 이 책의 표지 그림에서 눈물 흘리는 여인에게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성모 마리아입니다. 15세기 플랑드르 화가 디에릭 보우츠(Dieric Bouts, 1415~1475)는 슬픔에 빠진 성모의 표정을 붉게 물든 눈동자까지 포함해 놀랍도록 섬세하게 그렸죠. 심지어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방울까지도 극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저 그림 앞에서 중세인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판 데르 베이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438년, 프라도미술관


극사실주의의 선구라고 일컬을 만한 비슷한 다른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역시 15세기 플랑드르 화가인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1400~1464)의 저 유명한 작품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에서도 눈물 표현의 ‘사실성’은 여지없이 확인됩니다. 아들 예수의 죽음 앞에서 무너져내린 성모 마리아의 두 뺨에 눈물방울이 선명합니다.     



영국 출신의 저명한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최근 국내에 출간된 《포즈의 예술사》라는 주목할 만한 저서에서 이 그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초기 화가들은 인물의 얼굴을 표정 없이 그림으로써인간의 감정에 소홀한 경향을 보였다화가들이 서서히 인간 얼굴의 감정 변화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면서야매우 감동적인 미술 작품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십자가에서 내림>은 완벽한 사례다이 플랑드르 화가는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이 장면에서 주변에서 애도하는 이들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고통을 눈물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15세기 이후 서양미술사에서 우는 얼굴을 찾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솟아납니다. 그렇다면, 우리 옛 그림 가운데 ‘우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있을까?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묘사하는 데 유난히 인색했던 조선 시대에 눈물 흘리는 모습을 화폭에 그려낸 화가가 과연 있었을까?     


챠오빈 <삼채불열반조상 Par nirvana>,  1503년, 채색 도자기, 중국



그보다 먼저 동북아시아 미술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는 없을까. 놀랍게도 그 구체적인 물증을 16세기 초에 제작된 중국 도자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반에 든 부처 앞에서 슬픔에 빠진 나한들의 모습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빚어냈죠. 특히 가운데 인물의 동작을 주목해 봅니다. 눈가에 올린 손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려는 행동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15세기 서양의 그림이든 16세기 중국의 도자기든 종교적 죽음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입니다. 인간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슬픔은 종교라는 자장 안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순수하게 특정한 개인이 느끼는 감정으로서 ‘우는 행위’를 묘사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옛 그림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난 시기는 당연히 조선 후기입니다. 화가들이 그림의 소재로 ‘평범한 사람들’과 ‘일상’에 눈을 돌린 결과, 흔히 우리가 ‘풍속화’라 부르는 일련의 그림들이 등장하게 되죠. 그리고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서 ‘우는 모습’을 묘사한 결정적인 그림의 존재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로 그 그림이었죠.     


김홍도 <서당>, 《단원 풍속도첩》, 조선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26.9×22.2cm, 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화면 가운데 있는 친구가 이 장면의 주인공입니다. 훈장님께 혼이 났는지 돌아앉아 훌쩍거리고 있죠. 위에서 본 것처럼 눈가로 가져간 손은 인물의 ‘우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동작입니다. 우는 아이의 얼굴을 확대해 보면 그 생생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에 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왜 김홍도, 김홍도 하는지 알겠습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정지 화면을 보는 느낌이죠. 가운데 우는 아이는 물론이고 훈장과 다른 학동들의 표정에도 생동감이 넘칩니다. 더욱이 서럽기 짝이 없을 우리의 주인공과 달리 주변 인물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다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죠. 참 따뜻한 그림입니다. 화가는 어느 시골 서당에서 일어났을 법한 이 장면을 전혀 무겁지 않게, 그러면서도 정감 넘치게 그려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서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이 그림의 진가를 새삼 다시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주인공도 지금은 서러워 울지만, 금방 기분이 풀리면 다시 환하게 웃겠죠. 화가의 그림이 그렇다고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 옛 그림으로는 유례없이 ‘우는 얼굴’을 보여줬다는 점만으로도 김홍도의 <서당>은 우리 미술사에 우뚝한 작품으로 남을 겁니다.          



※ 이 글은 아트렉처(artlecture.com)에 먼저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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