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세계
이상하게 엄마들 모임에만 가면
내 머릿속에 암호 해독기능이 패치된 것처럼
숫자 모드로 변한다.
이제 곧 6세.
한글 고민의 시작이다.
한글 배움을 앞두고 정말 여러 가지 썰을 들었다.
한글을 4-5살에 배우면 상상력이 부족해진다,
한글을 7살쯤 늦게 배우면 빨리 깨우친다.
오박사 님도 6살 전에 한글 학원은
보내지 말라고 하셨다.
엄마들 모임을 통해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 설화에선
한글 교육은 늦게 하라는 말 뿐인데
결국, 아무것도 안 시키는 엄마는 나뿐이었다.
학습이라곤 집에서
아이의 온갖 버르장머리 끝에 받아낸
하루 한 장의 숫자 쓰기가 전부였다.
어쨌든, 두 달 후면 6살.
6세, 6세 비상상황 발생
다시 한번 말한다!
여기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 엄마 발생!
나중에 후회할 엄마 발생!
결국 먼저 계산기를 켜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의 교육 길잡이라는 명분 아래.
한글이 끝나면 영어에 대한 숫자 한 판이 벌어진다.
여기서는 놀라는 엄마와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엄마로 나뉜다.
바이링구얼이 되려면 24개월 후부터 바로 노출해야 해
영어 영상 시간은 1시간이 좋다.
영유를 다니지 않을 거면 하루 3시간은 들어야 한다.
엄마표 영어를 일찍부터 실천한 엄마들은
입에 모터가 달린 듯
이 때다 싶어 우리 아이 발화에 대해
설명인 것처럼 하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도 놀랬다니까! 그냥 공놀이하는데
나한테 갑자기 who's gonna be 이래!"
정보를 얻으려고 나왔지만
이렇게 많은 정보를 얻으려 나온 건 아니다.
엄마들의 숫자 읽기가 끝났으면
여자로서의 숨겨진 숫자 읽기가 시작된다.
C사의 미니백 가격은
둘째까지 기저귀 뗀 여자의 숫자였고
G사의 쇼퍼백은 값비싼 학원의
책을 넣어야 하는 엄마의 당연한 소비였으며
M사 패딩의 역시즌인 7~8월은
라이딩을 해야 하는 엄마라면
꼭 알아야 할 숫자였다.
이론에 가까운 소비였다.
대화는 쉴 틈 없이 흘러가는데
내 머릿속에는 계산기 소리만 난다.
'그래서 저게 얼만데?'
컴퓨터가 0과 1로 되어있는 세계라 생각했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사람들을 만나면
내 머릿속이 숫자로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학원은 얼마씩 해요?
좀 비싸긴 하죠?"
이 질문은 화근의 시작이었다.
"예체능은 원래 싼데
영어로 하는 미술이랑 과학이라
월에 25 정도?"
재빨리 대답한 후
"예준이 아버님은...
근데 무슨 일 하세요?"
이 말인즉슨
애 아빠가 무슨 일을 하길래
너는 이 학군지에서 그리 큰 집에 살고 있는 것이냐
우리는 10~20평인데 30평이라니
넌 분명 전세여야만 해...
마지막 추측까진 아니길 바란다.
내가 잘못 느꼈던 것이길.
순식간에 공기가 달라졌다.
소소하게 그룹 지어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들도
시간차를 있었지만 일제히 모두 나를 쳐다봤다.
로봇들이 나의 언어 속에
숨겨진 숫자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오늘 꼭 알아내겠다는
비장한 각오마저 느껴졌다.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입꼬리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까지.
"그냥 직장인이에요."
여유 있는 끝음 처리와 과하지 않은 미소는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듣기 좋은 오해가 오래 퍼지니까.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아니라
사실 이건 내가 몰래 뗀 굴뚝이다.
엄마들이 이런 오해를 하도록
멀리서도 알 수 있게
나는 오래전부터
먼저 숨겨진 숫자 연기를 살살 피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