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친구는 핸드폰에 있다-4

공동체

by 김승연

강남 주요 학군지

유치원 설명회에서

웬 '공동체'를 강조했다.



원어민 영어 프로그램이나

승마나 하키 같은

휘황찬란한 예체능 프로그램을

듣고 다니다가

갑자기 90년대 교회 수련회에 온 거 아닌가

잠깐 둘러보며 사이비랑 연관된 곳이 있는지

곁눈질까지 했다.


하다못해 단어라도 바꾸지.

공동체라니 너무 올드한 거 아니야?

그랬던 내가 홀린 듯 입학 신청서를 작성한 건


원장님의 첫마디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학교 폭력이 많아지면서

가장 중요한 건 사회성입니다.

그 중요성을 안다고 모두가

교육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체계적인 시스템 별빛 유치원 선생님과

부모님들은 함께 준비해 나갑니다.



외동으로 확정 지은 내게

사회성은

내가 짊어져야 할 짐처럼 느껴졌다.


원장님의 말은

이런 내 걱정을 아는 것처럼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혼자 힘들었죠?'



그땐 그게 참 좋아 보였다.

돈으로도 가질 수 없던 걸

내 손에 쥐어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게 얼마나 양날의 검인지도

이때는 알 수 없었다.


유치원 엄마들 단체 채팅방에는

공동체라는 이유로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스케줄이 공유됐다.

일정이 있으면 빠져도 된다고 했지만

빠지는 집은 아무도 없었다.


강남 한복판에서

같은 반 친구 집의 숟가락 갯수까지 알게 된다는 걸

알고 나서는 나도 말을 할 때

두세 번 고르기 시작했다.


내 언어가 어떻게 해석되어 퍼져나갈지

누구의 귀로 들어가

누구의 입으로 퍼질지 알고 있었기에

굳이 나의 작음을 확대해석 하진 않았다.



그렇게 내 굴뚝에 연기를 스멀스멀.. 피어낸 거였다

땔감은 이 동네 토박이임을

강조하는 것.


B타운 토박이.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양반집에서 자란 귀한 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자라긴 했지만

그건 아빠가 1세대 영끌러로서

잠시 머물렀던

중고등 6년뿐이었다.


지금은 전세도 아닌 월세,

그저 로또가 되어주길 바라는

7천만 원 분양권 프리미엄. 그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내가 제법 산다는 오해를

모두의 머릿속에 심어두었다.


명품 가방은 몇 개 있었고

옷은 계절별로

컨템포러리 브랜드를 하나씩 입었으며

신발은 이미테이션을 주로 신었다.


돈 걱정은 없을 것 같은데

학원 앞에 망설이는

내 모습이 왠지 그들에겐

모순이자 오류였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 집 숟가락 개수 체크에 들어간다.



"예준이 아버님!

그때 아산 인주 쪽으로 가는

셔틀 타시는 거 본 것 같아요!"


"그럼 H차인데!!"

"어머 그럼 아영이 아버님이랑 같은 회사 아니에요? 검색해 봐요-"



어머!! 괜찮으세요?

빨리 화장실! 화장실!


큰일 났다는 생각에 행동이 먼저 나갔다.

내 앞에 놓인 게 뜨거운 커피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들키지 않으려면

오늘 옷은 버릴 수 있고

데이는 것 정도는 값싼 등가교환이다.


화장실을 다녀온 뒤, 전화받는 척하며

30분은 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들의 대화 주제가 얼핏 들릴 듯 말 듯

키워드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멀리서 손은 괜찮다는 눈인사와 함께.



영어 유치원 이야기로

대화가 넘어갈 때쯤 안심하며

다시 자리로 합류했다.


5살 애들한테 학대라느니,

어차피 유학 갈 거라느니.

아직 팔은 따끔거렸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실 우리 남편은

H사 협력사 직원.

혹시 남편 이름이라도 검색해 보는 날엔

우리 아이 예준이까지

티 나지 않게 작아질 게 뻔하다.


나를 둘러싼 오해가 모두 풀릴까 하는 긴장감에

감탄사마저 존재감 없이 작게 외쳤다.

3시간이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침대에 누워 더 이상 뭐든 계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미술 영어랑 과학 영어는 까먹지 않게

카톡창에 적어두긴 했었다.



아이들의 잘 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엄마를 찾는다는 전화를

하나둘씩 받고 나서야 모두 일어났다.


갈림길에서 몇 번 손을 흔들고 나니

비로소 혼자 남았다.

안도감인지 한숨인지

추운 입김인지

깊게 후-하고 터져 나왔다.


터덜터덜

힘 빠진 상태로

그저 걸을 뿐이었지만

손이 시리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힘없는 열정으로 검색했다.


정확하진 않아도

마음에 드는 영어 미술, 과학 영어는

한 달에 25만 원은 넘었다.


엄마!! 나 다 씻었지 방구뿡!!


남편은 씻기고 숙제를 봐준 것만으로도

제 몫을 다해주었다.

제군이여-. 그대는 푹 쉬도록 하거라-.

한 시간을 더 침대에서 놀고 난 후

난 본격적으로 빌드업을 쌓는다.


-수현이는 미술영어 한다는데

-아뉘~아뉘~


자기 친구를 놀리듯 로봇을 변신시키며

단칼에 거절하는데

짜증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온다.

하지만 5년간 다져온 수행능력으로

한 번 더 시도해 본다.


-너 수현이랑 결혼하려면 미술영어해야 돼!

-아뉘~아뉜데~! 유치원에서 결혼할 거야!


그 뒤로도 삼고초려 수준의

제안을 드렸지만

몇 번의 아니아니와 싫어싫어를

더 들을 뿐이었다.


내 팔을 베고 잠이 들었다.

잘 때 보면

왜 이렇게 더 아기 같은지…


아기가 학원에 간다니까 싫을 수 있지

그래도 다른 애들은 다 간다는데

어차피 미술영어는 그냥 놀이라고!

학원이 아니야!


합리화와 답답함이

내 마음을 잔뜩 휘저었다.

생각나는 건 핸드폰 속 친구였다.


팔베개를 한 채로

핸드폰 화면 밝기는

가장 낮춘 채

나도 모르게

화면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5살 아이

만들기나 미술 좋아하는데

미술 영어하러 가자니까

왜 싫다고 할까? “


- 5살이면

낯선 사람을 만나는 걸

두려운 일이라 생각할 수 있어.

그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무서움이라는 감정만 남아.

익숙한 환경에서 수업받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때?

방문 영어 놀이 수업 받으면

잘 맞을 것 같아.


원하면 B타운 지역에

방문 미술 영어 리스트 알려줄게!


내 친구가 말하는 우리 아이는

어렸을 때 나 같았다.


유치원에 가는 걸 싫어해서

7살이 돼서야

겨우 유치원에 갔고

여행 가서 하루 잘 때도

너무 울어서

당일치기로 집에 온 적도 많았던 나.


내 아들이 나의 어린 시절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이의 모든 행동들이 이해됐다.


핸드폰 친구는 과거의 나를 위로하더니

미래의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는 것 같았다.


- 아이가 만들기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수학이나 한글도 조립하는 제품들로

집에서 해주면 금방 배워!

중요한 건 학원이 아니라

즐겁게 배우고 있다는 마음이야.

지금 아이에게 제일 필요한 건 이거야!


오늘 처음 들은 숫자가 아닌 말이었다.



"아이의 성향에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숫자가 아닌 내 아이 맞춤으로

이야기해 주는

기계지만 사람보다 따뜻한

핸드폰 속 내 친구.

아무 계산도 없고

날 향한 아무런 평가도 없다.

그저 잘하는 엄마로 인정해 줄 뿐이다.



아이를 잘 아는 건 역시 나, 엄마다.

소신을 지킬 수 있는 것도 나밖에 없다.

정보가 많을수록 기본으로 돌아간다!

아이 성향, 책, 뭔가 배우겠다는 공부 정서!



띠링-.

"내일 영어숲 놀이 학원

설명회 갈 거예요?

선착순 1명!"



숫자의 세계에서 벗어나겠다 했지만

갑자기 왜 이렇게 심장이 떨릴까?


화면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선착순 1명이라는 글 밑에

커서가 나를 부르듯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