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살인.2 (효라빠 장편소설)
주형에게 형은 상처였다. 도형은 고등학교 다니는 딸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도형의 부인은 딸 은혜를 출산하면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아기도 출산 중 생명이 위험했지만 의사들의 노력으로 살릴 수 있었다.
시청에 다니며 딸만 바라보며 사는 형이 주형은 정말 안타까웠다. 그런 형에게 전화가 와있었다. 주형은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형~ 나야! 전화했었네?]
몇 통의 부재중 전화 때문에 주형의 목소리에서 평소보다 더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근무하고 있었나 봐?]
도형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축 쳐 저 있었다. 딸이 고등학생이 되고 십몇 년이 흘렀지만 그는 지금까지 그때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사동에 들어가 있느라고 못 받았어. 무슨 일 있어?]
[별건 아니고 시간 되면 집에 와서 술 한잔 할래?]
도형은 같이 술 먹자고 한 적이 별로 없었다. 혼자된 이후로 거의 매일 술 마시는 자신을 주형이 안 좋아했기 때문에 술 먹자고 하면 잔소리 할게 뻔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형이 그런 말을 하자 주형은 이상한 마음에 한번 더 물었다.
[술? 갑자기 왜?]
[그... 있잖아...]
도형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뭔데 말해봐]
정말 무슨 일이 있는지 주형이 긴장된 채로 물었다.
[저... 오늘이 형수 기일이야. 은혜랑 같이 제사 지낼 건데 너 올 수 있나 해서. 막상 부를 사람이 너 말고 없네]
힘들게 꺼낸 말은 17년 전 돌아가신 형수의 기일이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주형은 그 사고가 햇살 좋은 봄날에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지금 퇴근하니까 바로 들를게.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요즘 회사에 일이 있어서 깜빡해 버렸네.]
[아니야. 괜히 내가 미안하지]
미안하다고 하지만 도형의 목소리에는 안도의 기색이 느껴졌다.
주형은 집으로 가려던 차를 돌려 형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와이프에게 사정을 말하며 못 간다고 전했다.
"빨리 왔네?"
도형이 통화할 때와는 다르게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집에 안 들르고 바로 왔어. 아직 안 했지?"
"할게 뭐라도 있겠냐. 음식 좀 올리고 마는 거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도형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그래도 형수님 제사인데 신경 써야지"
주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거실에는 조촐하게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다. 시장에서 사 온 듯한 전과 나물 그리고 형수가 생전에 좋아했던 피자가 올려져 있었다. 형과 하나밖에 없는 조카인 은혜가 준비한 듯싶었다. 진한 향 냄새가 거실 안을 감싸고돌았다. 오랜만에 맞는 향 냄새에 주형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17년이란 세월이 흘러 형의 얼굴엔 주름이 가득 찼고 검던 머리카락은 희게 변했지만 형수님의 사진은 젊었을 때 싱그러운 모습 그대로였다. 늙지 않은 그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죽은 사람보다 살아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산다는 게 뭔지...' 주형의 머리에서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돌려 봐도 은혜는 보이지 않았다.
"은혜 어디 갔어?"
"방에 있지. 같이 준비하긴 했는데 아직도 제사 치르는 게 쉽지 않나 봐"
"요즘은 학교 잘 다녀?"
주형이 걱정되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많이 좋아졌어. 학교 옮기 길 잘했어. 친구도 새로 사귀고 안정을 찾은 듯해. 공부한다며 학원도 다니고 있어. 그 정도면 많이 좋아진 거지"
은혜 얘기를 하자 도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도형은 17년 전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만삭의 아내가 진통을 느끼자 새벽에 분만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는 그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 처음이라 경황이 없었지만 드라마에서나 볼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와이프는 분만실로 들어가고 자신은 대기실에서 속만 태우고 있는데 갑자기 담당 의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나타났다. 의사가 하는 말은 태반 조기 박리로 출혈이 심해 산모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형은 의사의 설명을 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감 잡을 수 없었다. 의사가 하자는 대로 했고 간호사가 건네는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시간이 지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간호사가 애기 보에 쌓인 핏덩이를 데리고 나왔다. 산모는 어떠냐고 물었을 때 도형은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말없이 눈치를 보는 간호사의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도형은 아이를 안고 분만실로 들어갔다. 의사들이 긴급하게 심폐소생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숨을 쉬지 않는 환자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듯 의사들은 마지막 발악으로 심폐소생술을 해 나갔다. 그녀의 한쪽 팔이 힘없이 침대 밑으로 툭 떨어졌다. 하얀색 이어야 할 침대 보는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산소통 옆 작은 모니터의 오르락내리락했을 가는 실선은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삐~' 하는 기계음이 계속 울려 퍼졌지만 의사들의 거친 숨소리에 파묻혀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도형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죽을 것 같았지만 가슴에 안겨있는 핏덩이 때문에 정신을 놓아 버릴 수 없었다. 사랑하는 그녀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은혜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었다. 남들에겐 따스한 5월이 도형에게는 참혹한 5월이었다. 살아오며 죽고 싶단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커가는 천사 같은 은혜를 보면서 안간힘으로 버텼다. 그런 은혜가 몇 년 전 정성 들여 돌봐주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방황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금은 학교도 새로운 곳으로 옮기고 많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은혜야. 삼촌 왔어. 나와 볼래?"
도형이 방에 있던 은혜를 불렀다.
"삼촌 오셨어요?"
은혜가 방에서 나오며 덤덤한 표정으로 주형에게 인사를 했다. 어렸을 때는 무척 살갑게 따랐는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거리감을 느끼는 듯했다.
"은혜야 잘 있었어? 삼촌이 자주 와야 하는데 시간이 없네. 요즘 학교도 새로 옮기고 적응 잘하고 있다며?"
주형이 오랜만에 보는 은혜의 모습에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전에 다니던 학교보다 좋아요. 친구도 많이 사궜어요"
여전히 묻는 말만 짧게 대답했다.
"다행이다. 우리 은혜는 고등학교 올라가더니 이제 아가씨 같네. 하하.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건강하고 착실하게 학교 다니는 게 중요하지. 알았지?"
주형이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은혜가 돈을 받아 쥐며 덤덤하게 말했다.
"방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어. 삼촌은 아빠랑 술 한 잔 할게."
"네."
주형은 어렸을 때 그렇게 따르던 하나밖에 없는 조카의 무덤덤함이 많이 서운했지만 사춘기 여고생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형. 우리 소주 한잔 하자."
"네가 술 먹자고도 하고 웬일이냐?"
맨날 술 마시지 말라는 동생의 핀잔에 주눅 들 정도였는데 같이 한잔하자는 주형의 말에 도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늘은 형하고 한잔하고 싶네."
주형이 형의 대답에 괜히 미안해서인지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술만 마시면 주체를 못 하니 네 마음도 이해해"
"형, 이제 형수님 그만 잊고 새롭게 시작하면 안 돼?"
주형이 술의 힘을 빌려 힘들게 말을 꺼냈다.
"그 말하자고 한잔 하자고 한 거야?"
도형의 얼굴이 굳어졌다.
"형수님 돌아가시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어. 이 자리에서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하늘에 계신 형수님도 형이 사람답게 살았으면 할 거야. 그래야 은혜도 더 힘이 날 거고."
주형은 할 말을 미리 준비하고 온 듯했다. 거침없었다.
"이런 말 하려면 앞으로 집에 오지 마. 꽃이 진다고 그 꽃을 잊을 수 있니? 나에게 은혜 엄마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꽃이야. 절대 잊을 수 없어.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도형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형을 쳐다봤다.
"형 마음도 이해하지만 꽃도 피고 지는 거야. 우리 인생도 그러잖아. 가을이 지나면 추운 겨울이 오고 다시 따스한 봄이 찾아오고, 형도 이제는 봄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형이 그토록 사랑하는 은혜를 위해서도 좋을 거야."
"네 꽃은 피고 지고 그럴지 모르겠지만, 내 꽃은 한 번 피면 영원해. 그러니 너는 걱정하지 마. 은혜가 지금 안정을 찾기 시작했는데 내가 여자를 만나면 또다시 방황할 수 있어. 나는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은혜를 위해서 남은 생을 살 거야. 그거 하나면 족해."
도형은 확고하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식탁 위의 소주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얼굴이 찡그려졌다. 쓴 소주가 자신의 인생 같았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고. 나는 지금도 형이 사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여서 그러는 거야. 꼭 다른 여자를 만나라는 것이 아니라. 취미생활을 한다거나 형의 인생을 살아 보라고 한 말이야"
주형이 형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취기 올라 눈이 풀려있는 형을 보자 다시금 마음 한편이 쓰라려 왔다.
"네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 남은 인생 은혜만 바라보고 살게. 나는 그게 좋아. 은혜가 자기 엄마를 꼭 빼닮았잖아. 은혜는 하늘이 나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야.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 은혜가 잘 자라 좋은 사람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네 말대로 해 볼게. 그러기 전 까지는 이대로 살아갈 거야."
도형이 진지하게 답했다. 얼굴이 술기운으로 붉게 피어올랐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는 또렷했다.
"형이 그렇다면 내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네. 은혜만 생각한다고 했으니까. 앞으론 혼술 좀 하지 마. 알았어? 그렇게 자신 있으면 자기 몸은 챙겨야지."
주형은 형이 다른 여자 만나길 바라는 것보다 술로 고통을 풀려고 하는 생활이 싫어서 하는 말이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도형이 술에 의존하는 건 사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를 보듬어 주는 건 술밖에 없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은혜를 잘 보살펴 줘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 왔지만 이제는 은혜를 지켜줄 마지막 사람은 자신이었다. 소주잔을 내려놓은 도형의 손이 이제야 떨리지 않았다. 술에 의존한 삶을 살다 보니 알코올 중독 증세가 나타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손이 떨렸다. 어쩌면 그런 아빠를 보며 은혜가 방황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형은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형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형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아 형을 믿기로 했다.
"형. 그럼 나 일어날게"
"그래. 와줘서 고마워."
"아니야. 당연히 와야지. 내년엔 내가 먼저 연락할게. 술 그만 마시고 마무리 하자."
주형이 돌아간 빈자리가 도형은 크게 느껴졌다. 도형은 액자 속 사랑했던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두 눈에 눈물이 흘렀다. 펑펑 울고 싶었지만 은혜가 걱정할까 봐 차마 소리 내지 못했다. 코가 막혀오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제는 꿈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는 그녀가 미치게 보고 싶었다. 얼굴 한번 쓰다듬어 보고, 잠깐이라도 좋으니 말 한마디라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동생의 말처럼 다 잊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럴수록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기만 했다. 도형의 소리 없는 흐느낌 만이 빈 거실을 가득 채웠다.
"아빠 또 울어?"
방에 있던 은혜가 문을 열고 나왔다. 오히려 은혜가 더 덤덤해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의 정을 느끼지 못해서인지 엄마에 대한 애절함이 없어 보였다.
"아냐,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또 울잖아"
"미안해. 목이 좀 컬컬해서 그런가 봐"
"아빤 지금도 엄마 생각 많이나?"
"그렇지.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사람인데. 너는 엄마 안 보고 싶어?"
도형이 은혜 모르게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엄마가 보고 싶긴 해 그런데 막 슬프고 그러진 않아. 아빠 나 무심하지?"
은혜가 엄마의 사진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엄마 얼굴 한 번 못 봤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무심하다는 은혜의 말을 듣는 도형의 가슴이 더 아려왔다.
"엄마랑 나랑 진짜 닮았어? 아빠는 술만 취하면 그랬잖아. 엄마를 빼다 박았다고"
"그럼. 네가 엄마 닮아서 이렇게 예쁘잖아. 아빠는 네가 있어서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었어. 네가 없었다면 그 사고가 있었을 때 아빠도 엄마 따라갔을 거야. 은혜야 아빠 옆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도형이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은혜의 손을 잡았다.
"아빠, 내가 잘할게. 그동안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아빠의 말을 듣고 있던 은혜도 눈가에 눈물이 번졌다.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자. 아빠가 우리 은혜 잘 지켜줄게."
도형이 울음을 멈추며 말했다.
"아빠 하는 거 보면 내가 아빠 지켜줘야 할거 같은데?"
은혜가 아빠를 안으며 말했다. 미소가 얼굴에 살짝 머물렀다. 은혜는 엄마를 잊지 못하는 아빠가 불쌍했다. 그리고 아빠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방황했던 자신의 행동에 미안해졌다. 불쌍한 아빠가 엄마 때문에 가슴 아픈데 자신까지 더 힘들게 했던 것 같았다.
"그래, 이 못난 아빠 좀 잘 지켜주라"
도형이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으며 말했다.
"네. 김도형 씨는 김은혜가 잘 지켜주겠습니다."
은혜가 웃으며 아빠의 얼굴에 번져있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 주었다.
엄마가 없지만 둘만의 가정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화요일 업로드할 계획입니다. 계획은 계획일 뿐이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