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어오던 1년 전 시 필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하루에 10편을 했다.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시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시를 옮겨 적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계획을 바꿔 하루 5편을 했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고 내가 의도했던 대로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지금은 소설을 쓰느라 하루에 3편씩 필사하고 있다. 분량은 적어졌지만 시에 더 깊게 다가갈 수 있는 거 같다.
이전에 '1,000편의 시를 필사하면 무엇이 변할까'라는 주제로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지금은 1,500편 정도 필사를 했고 1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시 쓰는 것에 관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 정도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
그 변화에 관한 기록을 남겨 보고자 이렇게 몇 자 적고 있다.
내가 시를 필사하는 가장 큰 목적은 시를 잘 쓰고 싶어서였다.
'이제 잘 쓰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대답은 '글쎄......'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그 전보다 시를 못쓰게 된 건 아닐 것이다.
신기한 건 1,000편의 시를 필사했을 땐 시를 더 못쓰게 되었다.
그 이유는 멋지고 아름다운 다양한 시들을 보면서 시에 대한 나의 눈높이가 높아졌고 내가 그 정도의 시를 쓰지 못한 다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내가 쓴 시들을 남들에게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1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다행히 그런 자격지심은 많이 줄어든듯하다. 그렇다고 그때와 다르게 지금의 내가 시를 더 잘 쓰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다면 다양한 시를 보면서 시를 잘 쓴다는 것은 기술적이 것이 아니라 감성적이라는 것을 조금 깨달은 거 같다.
그전의 '좋은 시란?' 찬란한 어휘를 사용하고 거창한 문구가 들어간다고 생각했다면, 1년이 지난 지금의 좋은 시란 시를 쓰는 사람의 진솔하고 따스한 마음이 들어간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시인들 같이 화려한 기교와 깊이 있는 시를 쓸지는 모르더라도 내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이야기를 쓰면 그게 나만의 시고 멋진 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1년 동안 시를 필사하면서 또 다르게 깨달은 게 있다면 시를 통해 인생에 대해 조금 알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나태주 시인은 '행복'이라는 시에서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조지훈 시인은 '사모'라는 시에서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안도현 시인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에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외의 많은 시들을 통해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분노와 체념, 고통과 극복 등 많은 것들을 느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알아갔고 사람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많은 걸을 알게 됐다.
오히려 시를 잘 쓰는 기술적인 방법보다 인생에 관해, 삶에 관해 조금이라도 더 깨달은 게 큰 수확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앞으로도 시 필사는 계속해 나갈 것이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만년필을 들 수 있는 힘이 없을 때까지 할 거니까 아마도 숨이 멈출 때 까지는 계속할 거 같다.
오늘은 첫눈이 내리는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내년 이맘때 새로운 첫눈이 내려 필사 2주년이 되면 나는 어떤 감정을 받았고, 어떤 사람이 되었으며, 어떤 작가가 되어 있을지 기대가 된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조정래 선생님의 말씀을 적으며 마무리하고 싶다.
[필사는 정독 중의 정독이다.]
[문학, 길 없는 길. 읽고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쓰고 쓰고 또 쓰면. 열릴 길]